칼럼과 시론모음

법치 무력화하는 전여옥·신영철의 '깡패정치'

강산21 2009. 3. 16. 12:54

법치 무력화하는 전여옥·신영철의 '깡패정치'

[박동천 칼럼] 카키스토크라시와 클렙토크라시

기사입력 2009-03-16 오전 9:32:30

 


 
카키스토크라시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어 카키스토스(나쁘다의 최상급)와 크라티아(지배)가 합성된 형태로 아리스토크라시(최선의 인물에 의한 지배)와 정반대가 된다. 가장 나쁜 자의 지배, 또는 악한에 의한 지배라는 뜻이다. 한자어를 써서 한 단어로 만들자면 악당정이나 악한정이 되겠는데, "언문"에 구애받지 않고 말하면 깡패정치 정도가 적당할 듯 싶다.

비슷한 말로는 클렙토크라시가 있다. 이것은 도둑을 뜻하는 그리스어 클렙테이스와 크라티아가 합해진 형태이다. 한자어로 만들면 절도정 또는 강도정이 되겠지만, 역시 "언문"에 대한 두려움만 떨쳐버리면 도둑놈정치가 번역어로 알맞겠다. 카키스토크라시나 클렙토크라시와 같은 단어는 어차피 점잔만 빼고 있기에는 뭔가 갑갑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절박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통로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소위 사회지도층에 속한다는 인물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카키스토크라시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우선 한나라당(서울 영등포갑) 전여옥 의원의 입원 행각을 보자. 그 분이 얼마나 심한 상해를 입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마는,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이 전 의원의 억울한 사정을 일부러 또는 모르고 쏙 빼놓고 보도하지 않았다면, 그때 있었던 일만 가지고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었다면 "백만번에 한번 있을" 일인 것 같다.

참고로 "백만 번에 한번 있을"이란 뉴질랜드 영어에서 희귀하다는 뜻을 강조해서 말할 때 쓰는 표현으로, 이 나라에서는 인구가 오백만도 안 돼서 그런지 백만이 아직도 굉장히 큰 수로 통한다. 연속극 대사에서 남자가 실없이 여자를 유혹할 때, "당신은 백만 명에 하나 있을 사람"이라고 한다든지, 학교에서 폭력사건이 터졌을 때 우연한 사고임을 강조할 때 "백만 번에 한 번 있을 일"이라는 식으로 쓰인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드레스에 묻은 정액의 주인이 빌 클린턴의 것이 아닐 확률이 "2조분의 일"이라고 할 때도 누가 2조 번의 유사한 사례들을 다 세본 다음에 한 말은 아닐 테니, 내가 전 의원을 두고 백만 번을 말한다고 해서 "언제 세봤느냐"는 트집만은 잡지 말기 바란다.

전 의원이 그 백만 번 가운데 한 번에 해당할 가능성을 나는 배제하지 않는다. 즉, 70세에 가까운 여성이 힘이 무척 세서, 그보다 한 스무 살 쯤 젊어보이는 (그리고 체급 차이도 별로 커 보이지 않는) 다른 여성에게 멱살잡이를 잠시 한 것만으로, 후자의 안구를 움직이는 생리조직에 손상이 가서 신경성상사시증인지 뭔지 이번에 내 한국어 어휘력을 확장해준 일종의 사팔뜨기 증상에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70세에 가까운 노년기 여성이 그보다 한 스무 살 쯤 젊어보이는 다른 여성에게 멱살잡이를 잠시 한 유사한 사례가 백만 번 있다고 보면, 그 가운데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한 압도적인 대다수에서는 별탈이 없이 툭 털면 그만일 것이다.
▲ ⓒ연합뉴스

군사정권 때는 군출신 여당의원이 기자출신 여당의원을 술 먹다가 팼다든지, 청와대 2인자 노릇을 하던 경호실장한테 장관들이 조인트를 까였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그들이 병원에 드러누워 생떼를 썼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 <말죽거리 잔혹사>가 70,80년대뿐 아니라 00,10년대인 지금도 상당히 말이 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른 애들을 패던 정훈이가 막상 현수에게 터진 담에는 결국 부모들 사이의 권력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차지철한테 조인트를 까인 장관이 병원 침대에 누웠더라면, 진짜 목이 달아나지는 않았겠지만 장관 목은 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현수가 묵사발로 터졌다면 병원침대라는 지원 무기는 없고, 그저 혼자 삭여야 했을 것이다. 가령 눈알이 터진 현수 쪽에서 코피를 흘린 정훈에게 자비를 구걸해야 하는 상황도 가능하다. 영등포 갑구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 노릇을 하고 있는 전 의원도 뒷배를 믿는 바가 없다면 저렇게 누워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뒷배란 찍어준 3만5000여 명의 유권자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이처럼 '7080시대'와 '0010시대'가 말죽거리에서 다정하게 만나고 있는데,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점점 질이 저하되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에, 사실이라는 말이 아니고 순전히 가정법으로 만약에 말이지, 영등포 갑구에서 뽑힌 한나라당의 전여옥 의원이 지금 겪고 있는 병세가 그날 멱살잡이 때문이 아닌데, 뒤집어씌우기를 위해 저러고 있는 것이라면 뭔가 저질스러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알기로 7080시대에 여당 의원이 한 서민을 잡아넣기 위해서 병원에 누워 엄살을 부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영등포 갑구를 대표하는 한나라당 의원이 만에 하나 악질 "나이롱" 환자 흉내를 내는 것이라 하더라도, 혼자만 그런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닐 것이다. 영등포동, 당산동, 문래동, 양평동 유권자들의 신성한 주권에 따른 선택이고, 299명 국회의원 중에 한 명 정도 설사 좀 저질스럽게 유난스러워도 국사에 지장이 오지는 않는 한 그렇다. 그런데 170석을 보유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체계적으로 전 의원의 행태를 비호한다면, 만약 "나이롱" 환자로 밝혀지는 날 어쩌려는 것일까? 공공의료제도의 맹점을 고발하려는 목적이었다고 배시시 웃으며 넘어가려나? 그 결과가 얼마나 곤란할지를 생각하면, 그러니까 "나이롱" 환자였다고 밝혀지지 않도록 무진 애를 쓸 수밖에 없는 동기가 사전에 바탕으로 좍 깔려버린다. 이래저래 진상은 없어져 버리고 정략만이 남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지만, 현재 한국의 공공의료제도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 가짜 환자와 가짜 진단서를 분간해내지 못하는 사회적 역량부족과 시스템 미비가 핵심이다. 이는 민영화로써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깡패집단과 국가권력이 분간되지 않는 것이나 진짜 환자와 가짜 환자가 분간되지 않는 것이나, 표절하는 작가 또는 학자와 표절하지 않는 작가 또는 학자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나,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요소인 "도시게릴라"와 생존권 방어를 위해 망루에 올라간 피해자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 분별력이 없다는 동일한 형태에 속한다. 대법원장부터 "판결문에 오자가 있다면 법원장이 고치라고 지적할 수 있다"와 "법률을 잘못 적용했는데 고치라고 말도 못 하나"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 <세계일보> "이용훈 대법원장 이례적 기자간담회", 2009. 3. 6. ).

결국 데모크라시인지 카키스토크라시인지를 구분하는 관건은 결국 법치인지 무법천지인지의 문제로 돌아간다. 물론 "법"이라는 명찰을 단 일군의 문서, 또는 직함에 "법"자가 들어가는 일군의 사람들이 없는 사회는 선사시대 이후로는 없다. 법이 실제적 효과에서 인민의 이익에 봉사하느냐 아니면 악당들의 이익에만 봉사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래서 19세기 미국의 문필가 제임스 로웰은 "우리가 지금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인지, 아니면 악당들이 바보들을 등쳐먹는 카키스토크라시인지"를 대조했다.

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간하기 위해 법전이 있는지, 법원이 있는지, 법무부나 검찰이 있는지, 법조계라는 직업영역이 있는지를 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진시황 때도, 연산군 때도, 히틀러 때도, 전두환 때도, 그리고 김정일 체제에도 "법"이라는 명찰을 단 사회현상들이 풍성하지 않은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법치와 무법을 분간하기 위해 좋은 방법은 주어진 법조문 또는 사법제도가 있거나 없거나에 따라 어떤 차이가 생길지를 따져 보는 것이다. 있거나 없거나 별 차이가 없다면, 해당 조문이나 제도가 있으나마나라는 뜻이고, 따라서 그 지점에서는 법이 없다는 결론을 확정할 수 있다.

이제 신영철 씨가 대법관 지명자의 신분으로 국회 청문회에 임하던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2월 10일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당(경기 안양 만안) 이종걸 의원이 촛불시위 관련사건 배당에 관해 질문하자,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기계적으로 배당이 됐겠거니 이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대법원 자체의 해명 자료에서도 "쟁점이 유사한 사건에 대해 동일 재판부에 배당"했음을 인정했다. ("신영철 대법관 인사청문회 '거짓말'... 홍역 후폭풍" - 오마이뉴스, 2009. 2. 26). 물론 동일 재판부에 배당한 결정의 주체는 신영철 당시 법원장이므로, "컴퓨터 배당"이었다고 답한 것은 추가소명이 없는 한 알면서 거짓말을 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 대목이다. 지금 신영철 대법관의 거취에 관한 논란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사항에 관한 것이지만, 내가 집중하고픈 초점을 유지하기 위해 이 대목을 좀더 추궁해본다.

신영철 지명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다 털어놓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경우 "이유"는 어떤 종류의 동기를 두고 말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크게 두 종류를 구분해서 살펴야 한다. 공자는 "지난날에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했다 (『論語』, 「憲問」, 13). 자기 언행에서 일관성을 지키고자 목전의 이익이나 사회적 연고를 포기하는 사람들만 산다면 대부분의 형벌조항은 필요 없을 것이다. 언행의 일관성을 욕구충족보다 우선시하는 사람이라면 도덕기준들을 남에게 요구하기 전에 자신에게 요구할 테니까, 설령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고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영철 대법관은 "지난날에 했던 말을 잊지 않는 사람"에 해당하지 않는다. 박재영 판사로 하여금 사표를 내게 만든 정황을 주도했던 장본인으로서, 바로 그 일을 묻는 질문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은폐하고 왜곡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자 식의 구분을 약간 바꿀 필요가 있다. 두 종류의 인간을 나누기보다는 두 종류의 동기를 나누는 것이 소모적 논의를 피하는 길이다.

다시 말해, 신영철 대법관을 두고 "지난 날에 했던 말을 잊는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바로 "거짓말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이 어딨냐"는 단말마의 비명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인격 전체를 찬양하거나 정죄할 필요 없이 해당 행위의 동기만을 따지는 것이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즉, "지난날에 했던 말을 잊지 않으려는" 동기와 "잊으려는" 동기만을 구분하고 총체적인 인격은 논외로 쳐야 한다. 물론 "잊으려는" 동기란 뭔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반증이 된다.

형벌조항이란 바로 이런 동기에서 나오는 행위를 겨냥해서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1943년에 드골에게 보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 "정치체계는 모두 이중의 메카니즘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권력을 보유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성을 위해 헌신하게끔 만드는 메카니즘이다. 그리고 둘째는 정당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행동에 공포가 수반되도록 함으로써, 즉 형벌로써 그러한 행동을 억압함으로써, 그것을 방지하는 메카니즘이다." 지난 날에 한 말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즉 도덕적 고무의 메커니즘이다. 그러한 도덕성이 내면화되지 못한 경우를 위해 형벌을 통한 위협이라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인사청문회에서 신영철 지명자의 답변은 "지난날에 했던 말을 잊으려는" 동기에서 나왔다. 따라서 이는 형벌로 위협해서 방지해야 할 동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에 이와 관련된 어떤 형벌의 위협이 있는가? 법조문이 없지는 않다.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은 제14조에 "위증 등의 죄"를 정하고, 제1항에서 "선서한 증인 또는 감정인이 허위의 진술이나 감정을 한 때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규정이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마땅히 고발을 해야 할 국회가 이처럼 명백한 위증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절대다수 170석을 보유한 한나라당이 이 문제를 철저하게 정략적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위증을 문제 삼는 시각에게 오히려 색깔론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결함은 이와 같은 경우에 문제를 기껏해야 당사자의 "거취문제"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가버리는 우리사회 공론의 의제설정방식에 있다. 대법관 지명자로서 개인적인 정직보다 임용을 더 중요시하는 동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문제될 수 있는 일일수록 청문회에서 밝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은폐나 왜곡의 동기가 항상 충만한 것이다. 그런데 위증을 해서 청문회를 지나간 다음에, 나중에 위증 사실이 드러나는 최악의 경우에도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난다면, 위증을 하지 않을 까닭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다시 정리하자. 자신의 언행에서 일관성, 다시 말해 정직을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행위의 경우에는 형벌을 통한 위협이 사실상 불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정과 형편에 따라서 거짓말을 통해 목전의 이익을 챙기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형벌이란 개인들로 하여금 이런 유혹을 억누르도록 유도하는 자극제가 되어야 한다. 신영철 대법관 지명자도 위증의 유혹을 받았고 그 유혹에 넘어갔다. 그런데 청문회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 양심의 명령에 따라 그 유혹을 이겨내지 않는 한, 그를 유혹에서 건져낼 형벌의 위협이라는 메커니즘이 우리사회에 전혀 없다는 것이 내 요지다.

그 후에 밝혀진 모든 정황들에 관해 그가 정직하게 답변을 했더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란이 조금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다. 신 대법관 개인으로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최악이라고 해야 대법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뿐이다. 여건이 이와 같다면 정직을 명예나 권력이나 부나 위신, 그 어떤 것보다 최우선으로 추구하기로 인생을 걸고 결단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위증을 하게 되어 있는 구조라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이 카키스토크라시다. 거짓말을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고 도덕책에서 가르치고 거짓말을 범죄라고 법률에 적어 놓았지만, 거짓말을 실제로 처벌하는 메커니즘은 정해져 있지 않다. 보험금을 노리는 가짜 환자들이 병원에 넘친다는 불평이 자자하지만, 공권력이 가짜 환자를 가려낼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다. 노파에게 멱살을 잡혀서 사팔뜨기가 되었다는 국회의원이 있어도, 그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가 독자적인 사실에 입각해서 판명되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누가 얼마나 밀어주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리고 공직자가 그 자리에 앉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더라도 발각되지 않으면 당연히 그만이고, 설사 발각되더라도 자리에서 물러나면 끝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속언이 이보다 잘 맞을 수가 있는가?

사법기능이라는 것이 이런 수준이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면 명예훼손에 걸리는지도 결국 뒷배를 누가 봐주느냐에 따라 달라지리라는 두려움을 나는 떨칠 수 없다. 그 두려움만 없다면 나는 지금 이 나라가 카키스토크라시일 뿐 아니라 클렙토크라시이기도 하다고 말했겠지만, 혹시 도둑놈정치라고 누구를 지목해서 불렀다가는 명예훼손이나 허위사실유포죄에 걸릴지도 모르니 미리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기고 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어쩌다보니 문장 중에 도둑놈정치라는 말이 들어가기는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을 적시한 것이 아니라 내 느낌과 내 의견임을 분명히 밝힌다. 미네르바는 사실을 마치 적시하는 양 말해서 걸린 것이고, 일기예보와 같은 예측이나 "지금 주식 사면 부자 된다"는 개인 의견의 표명은 문제가 없다고 한 김경한 법무장관의 지침을 믿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차! 김경한 법무장관께서 이루어진 사람이라서 지난날에 한 말을 잊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구나. 이를 어쩌나!

/박동천 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