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웬 녹색 뉴딜?

강산21 2009. 1. 12. 16:23

웬 녹색 뉴딜?
(서울대 경제학부 / 이준구 / 2009-01-10)



내가 대학생 시절부터 좋아하는 보컬 그룹 사이먼 앤드 가푼컬(Simon & Garfunkel)이 부른 노래 중 The Sound of Silence 라는 이름의 노래가 있다. 아주 멋진 이름이지만, 논리적으로는 모순을 안고 있는 표현이다. 침묵에 소리가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모순 때문에 더욱 멋있게 들리는 이름이 될 수 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그 안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수사법을 모순어법(oxymoron)이라고 부른다.


최근 정부는 이 모순어법의 목록에 가장 그럴듯한 사례를 하나 추가하는 공로를 세웠다. ‘녹색 뉴딜’이라는 정책이 바로 그것인데, 정부가 모순어법의 수사적 효과를 노려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는 ‘녹색’이라는 개념과 ‘뉴딜’이라는 개념이 모순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이름을 만들어 붙인 것 같다. 아니면 본질적으로는 모순이 될 수밖에 없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잘 알다시피 녹색이라는 것은 환경친화성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름 안의 뉴딜이라는 말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으로 4년에 걸쳐 50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투입해 96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하는데, 그 핵심이 토목공사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강에다 시멘트벽을 쌓고 여기저기 땅을 파헤치는 행위가 환경친화적일 리 없고, 따라서 녹색과 뉴딜은 상충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4대강 정비사업을 대표적인 환경친화적 사업이라고 강변하는 데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정밀한 사전 환경영향평가조차 없이 서둘러 기공식을 올린 토목사업이 환경친화적일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강변에 자전거길 만들고, 강바닥을 준설하면 저절로 강이 되살아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경의 ‘환’자도 모르는 사람이다. 생태계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조금만 알아도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비단 4대강 정비사업뿐 아니라 경인운하사업 등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많은 토목사업들이 환경파괴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밝혀질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환경친화적인 사업이라고 우긴다 해도 지금 당장 그것을 논박할 근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역사가 심판을 내릴 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된 다음에 그런 심판이 내려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말이지 이 정부의 토목공사에 대한 집착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대운하의 꿈이 좌절되자 꿩 대신 닭이라는 듯 이런저런 토목공사 계획을 정신없이 쏟아낸다. 경제전문가들이 그렇게 말리는데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가 자못 위태스럽게 보인다. 토목사업쯤으로 경제위기가 극복될 수 있다면야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에 시름만 커질 따름이다.


정부가 돈 풀면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뉴딜로 인해 96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떠들지만, 돈 풀어 일자리 만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지금 이 단계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경제의 체질을 바꿔 위기도 극복하고 지속적인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토목공사 끝나자마자 바로 사라질 일자리라면 설사 수백만 개가 만들어진다 해도 별 소용이 없다.


돈을 풀더라도 좀더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할 생각은 왜 못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이왕 돈 푸는 김에 꼭 필요하지만 종전에는 돈이 없어 하지 못했던 사업들에 착수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그런 사업들의 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토목공사에 대한 집착으로 판단력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업들이 눈에 띄지 않을 따름이다. 케인즈가 살던 때의 단순한 경제에서는 토목공사가 수요촉진책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70년 전의 일이고, 이제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뉴딜’이라는 말 그 자체도 마음대로 왜곡해서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뉴딜이라는 말을 듣고 테네시강의 거대한 댐을 연상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뉴딜이 거대 토목사업을 뜻한다는 것은 엄청난 오해다. 우리나라 사회 교육의 잘못 때문에 그런 오해가 빚어진 점은 이해하지만, 알 만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런 오해를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뉴딜정책은 대공황으로 인해 극도의 침체상태에 빠진 미국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루즈벨트(F. Roosevelt) 대통령의 개혁 프로그램을 일컫는 말이다. 그 중에서 테네시강 댐 같은 토목사업은 지극히 작은 비중밖에 갖지 못한다. 사회 교과서에서 케인즈적인 경기부양정책의 예로 뉴딜정책하의 토목공사를 예로 든 데서 뉴딜은 바로 토목공사를 뜻한다는 터무니없는 오해가 생겨났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현 정부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진보적 정책의 대명사가 바로 뉴딜정책이라는 사실이다. 미국 정치사에서 뉴딜정책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진보적인 정책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수적인 정부가 진보적 정책의 대명사인 뉴딜의 이름을 빌려 거대 토목공사의 정당성을 홍보하려고 하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뉴딜정책의 정확한 성격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뉴딜이 ‘미국국민에 대한 새로운 대우’를 뜻한다고 선언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의 인도를 바라고 있으며, 국부의 분배에 좀더 공평하게 참여할 기회를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국민에게 새로운 대우를 약속드립니다. 이것은 정치운동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장을 하라는 요구입니다.”


이 말에서 뉴딜은 전투적인 진보 이념을 대변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기에 토목공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 눈곱만큼도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뉴딜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이 정부가 싫어할 만한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 연방정부의 개입 범위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며,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새로 도입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퇴보라고 평가될 만한 프로그램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정부가 이 사정을 잘 알면서도 뉴딜이라는 말을 썼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짐작건대 그런 사정을 잘 모르고 그저 멋진 말이라고 해서 빌려 썼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뉴딜정책을 통해 대공황의 수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을 개연성이 큰 것이다. 녹색 뉴딜이라는 이름에 뉴딜이 대표하는 진보적 이념을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따져 보면 녹색 뉴딜이라는 것은 숱한 모순을 안고 있는 이름인 것으로 드러난다. 듣기에만 그럴듯할 뿐 알맹이는 전혀 없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이름이다. 우리의 걱정은 그 엉성한 이름과 달리 정책의 내용 그 자체는 알찰 것이냐에 있다. 불행하게도 정책의 내용만은 훌륭한 것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이미 부처별로 여러 번 나왔던 정책들을 적당히 짜깁기한 데 지나지 않는 녹색 뉴딜이 우리 경제에 새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녹색 뉴딜은 경제를 되살리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더 불안한 상황으로 몰고 갈 가능성까지 안고 있다. 지금은 경제가 무척 침체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토목공사에 그처럼 많은 돈을 쏟아 붓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경기가 일단 회복된 상황에서 토목공사에 쏟아 붓는 돈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되고 만다. 과열된 경제에 휘발유를 들이붓는 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제가 언제 회복될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4년이라는 기간이라면 그 안에 경기가 바닥을 치고 회복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그와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조건 돈을 풀 생각만 하는 것은 현명한 자세가 아니다.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고 정부 돈 풀어 일자리 만드는 데 열중하다 보면 경제의 안정기조가 매우 위태롭게 흔들릴 수 있다.


부동산정책을 볼 때도 그런 느낌이 들지만, 현 정부는 오직 발등의 불을 끄는 데만 마음이 팔려 있는 것 같다. 발등의 불을 끄고 난 후에 필연적으로 닥칠 상황에 대한 대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느낌이다. 마구잡이로 정부 돈을 풀고 주택 투기 억제장치를 모두 없애버리려 하는 태도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경기가 회복되어 물가안정이 당면과제로 등장하고 주택 투기가 또다시 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녹색 뉴딜이 우리 경제를 구원해주리라는 것은 무리한 희망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정부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다. 토목공사로 경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케케묵은 사고방식을 과감하게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절일수록 참신한 비전에 대한 국민의 갈망은 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다.


※ 출처 - http://jkl123.com/sub3_1.htm?table=my1&st=view&page=1&id=70

 

ⓒ 이준구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