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환상의 벽 / 박찬수

강산21 2008. 12. 31. 20:18

[아침햇발] 환상의 벽 / 박찬수
아침햇발
한겨레  박찬수 기자
» 박찬수 논설위원
이명박 정권의 첫해가 저문다. 반토막 난 주가에다 살벌한 국회, 언론 총파업까지 저무는 끝자락은 몹시 혼탁하기만 하다. 되돌아보면, 이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유난히 어수선했다. 국민들이 ‘대통령 이명박’에게 기대했던 건 유연함이었다. 한나라당을 천막 당사로 살려낸 박근혜 전 대표 대신에 이명박을 선택한 건, 유연함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촛불에 단단히 덴 이 대통령은 유연함을 버렸고, 그 빈자리를 이념 집착으로 메웠다. ‘실용주의’는 너무 쉽게 그 얄팍한 바닥을 드러냈다.

 

유연함을 버린 순간, 이 정권은 집단사고의 틀 속에 갇혔다. 집단사고란 일종의 집단 착각 현상이다. 1961년 4월 갓 백악관에 들어선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피그만 사건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중앙정보국(CIA) 지원 아래 쿠바 망명군 1500여명이 피그만에 상륙했던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중앙정보국은 망명군이 상륙하면 쿠바 민중이 내부 봉기로 호응해, 피델 카스트로 혁명 정권을 전복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케네디와 그의 참모 누구도 이 전망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쿠바 민중도 자신들처럼 카스트로 정권을 미워할 것이라고 착각했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질 않았다. 비슷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똑같은 방향으로만 생각을 모아가는 것, 이게 ‘집단사고’다.

 

지금 이명박 정권이 그렇다. 청와대는 물론이고 한나라당과 보수 단체, 심지어 보수 언론들까지 오로지 자신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모습만 보려고 한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와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정병국 의원은 모두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다. 오로지 이들이 방송법 개정을 주도하다 보니, 스스로 옳다는 확신만 더욱 굳어진다. 방송사 파업은 일시적일 뿐 충분히 진압 가능하고, 국민 다수는 자기들 편이라고 믿는다. 한나라당 내부엔 이런 시각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런 소리는 들으려 하질 않는다. 일부러 귀를 닫아버린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흔들리질 않는다. 집단 최면이고 집단 착각이다.

 

그 정점엔 물론 이명박 대통령이 있다. 장관들이 대통령 앞에서 절절매는 이유에 대해, 여권의 핵심 인사는 “정보의 차이 때문이다. 대통령이 가진 정보와 장관이 가진 정보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보의 바다에 빠진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서 서울 시내를 발 아래 굽어보듯이 자신이 모든 걸 다 알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진다. 이 환상의 벽을 주변의 충성스런 신하들이 더 높이 쌓아올린다.

 

집단사고에 갇힌 정권의 말로는 역사가 보여준다. 87년 갑작스런 호헌 선언으로 6월 항쟁의 불씨를 스스로 지핀 5공 정권이나, 96년 12월 노동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급속한 레임덕에 빠진 김영삼 정권처럼 그 예는 무수히 많다. 존 에프 케네디는 그나마 한 번 실패를 겪은 뒤 집단사고를 벗어나려 무진 애를 썼다. 측근 참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외부 전문가의 얘기를 열심히 들었고, 외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을 외교안보 정책 결정에 참여시켰다. 케네디가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노력 덕분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한 차례 교훈을 얻었을 법도 한데, 바뀐 게 전혀 없다. 유연하지 않은 정권엔 희망이 없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