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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공포, 실체는 있는가?

강산21 2008. 12. 30. 18:45

이슬람공포, 실체는 있는가?
이슬람, 공포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만나야 한다
입력 : 2008년 12월 29일 (월) 13:55:43 [조회수 : 632] 구교형

   
 
  ▲ 우리는 무슬림(이슬람교 신도)을 테러, 엄격한 종교전통, 반인권적 문화 등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게다가 최근 한국기독교인들에게는 이슬람과 무슬림이 큰 공포의 존재로까지 등장하고 있다. 바로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이슬람은 우리와는 무관한 종교로, 기껏해야 시사 상식 정도로만 접할 수 있는 생소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2001년 9.11테러 이후 주로 정치·군사적 사건들과 함께 찾아온 이슬람은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젠 외국인노동자들 속에 상당수를 차지하는 아랍권 국민들로 더욱 쉽게 만나지만 여전히 정서적 거리는 멀기만 하다.

같은 제3세계라는 약간의 동질의식을 제외한다면, 보통 우리는 무슬림(이슬람교 신도)을 테러, 엄격한 종교전통, 반인권적 문화 등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게다가 최근 한국기독교인들에게는 이슬람과 무슬림이 큰 공포의 존재로까지 등장하고 있다. 바로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다.

나 역시 지난 11월 경인지역 어느 선교단체에서 부탁받은 강의주제가 바로 '타종교의 이해-이슬람'이었다. 요즘 대학교에 이슬람권 출신 학생들이 많아져 혼란스럽다며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지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지난 주간 어느 전문가 집단모임에 참석했던 자리에서 이슬라모포비아의 실체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고위 관료를 지냈던 한 변호사가 초대된 자리였는데, 그는 이슬람에 대한 공포와 걱정을 쏟아내며 기독교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발언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은 3~4명은 한결같이 동감을 표시하며 이슬람이 가져올 공포의 세계를 염려하고 기도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무료로 나눠준 3권의 책자를 가져와 읽으며 심각한 수준에 이른 '이슬라모포비아'를 비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 잘못된 상황인식은 판단력을 흐린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슬라모포비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러한 공포가 기본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정보에 기반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얼마 전 이슬라모포비아에 대해 강의한 김동문 선교사가 잘 제시하였다. 그는 소위 '이슬람의 공포'로 제시되는 근거들이 구체적인 확인사실을 거치지 않은 것이거나, 막연한 사실을 크게 부풀리거나, 심지어 의도적 왜곡을 가한 것들이 많다고 했다.

사실 사람은 기본적 안전욕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어, 그걸 자극하는 반복된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사실관계를 거치지 않고도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몇 해 전부터 우리사회에 '북한 김정일의 지령을 받는 고정간첩이 청와대에 **명, 검찰에 **명, 국회에 **명' 식의 막연한 공포의식과 '민주노총·민노당·전교조·한총련은 빨갱이'라는 공식이 떠돌아다녔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근거 없이 그걸 믿고 있고, 그 공포는 현 대통령 당선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2. 잘못된 종교적 열정은 판단력을 흐린다

우리는 보통 개인적 죄성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인식하지만, 집단적 전통과 무의식적 습관 속에서 자라는 구조적 죄성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심지어 정당화하는 경향이 많다. 왜냐하면 후자는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일상적으로 공유하는 이념이나 전통, 자연적 정체성(성별, 민족주의, 애국심 등), 종교 등과 관련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자기 것에는 극단적 보수성과 폐쇄성을 보이고 남의 것에는 극단적 공격성을 드러낸다. 그런 현상에 빠지면 자기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생겨 자신도 늘 행하는 일조차 단지 다른 사람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극도의 증오심을 보이기도 한다(마 7:3~4). 기독교인들도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자기 종교에 대한 합리화 경향이 결코 적지 않고, 이슬라모포비아 과정에도 그런 오류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슬람의 공포'를 말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이슬람과 무슬림을 두려워한다. 기독교, 특히 전통적 기독교사회인 서구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비난받고 있고 쇠퇴하고 있는 반면, 이슬람은 갈수록 활기차고 확산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김동문 선교사의 <한국 교회와 이슬람>에 따르면 "이미 한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이슬람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그들은 근로자·학생·사업가로 들어와 암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기구에서는 2020년까지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겠다는 정책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한국은 핵심 대상국입니다." "무슬림 조직화의 중심은 대학이다. 유학생 중 상당수는 이슬람의 포교전략에 따라 자국에서 학업과 함께 포교활동을 위해 들어온 것이며, 한국의 이슬람교도가 14만 명을 넘었다고 분석했다."고 밝힌다.

<끝나지 않은 2000년>의 저자 마크 가브리엘은 "서양인들은 어린아이가 코란을 암송할 수 있다고는 좀처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중동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여섯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 나는 하루에 두 페이지쯤 되는 분량을 매일 암기해야 했다"고 말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모든 종교적 열정도 이슬람 전사를 기르기 위한 위험하고 무자비한 훈련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보면 우리 기독교는 그렇지 않은가?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선교의 종교다. 특히 근대의 서구선교는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이라는 평을 들었고, 지금 우리나라도 선교 120년 만에 세계 제2의 선교대국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또한 앞서 이슬람에 대해 비난하고 있지만, 기독교 역시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 직업이나 유학을 활용하여 실제적 선교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다음세대에 대한 기독교교육도 그 어느 다른 종교에 비해 왕성하다. 나 역시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이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위험하다고 평가된 적이 있는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행동도 우리가 하면 주를 위한 것이고, 그들이 하면 세계지배 야욕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더 나아가면 단지 종교적 열정을 넘어선 이슬람의 공격적 속성, 무력으로라도 이슬람세계를 만들겠다는 위험성을 지적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슬람은 전 세계를 종교로, 심지어 무력으로도 정복할 속셈을 가진 무서운 종교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그런 종교적, 군사적 전사로 길러지고 지금 그런 사명을 부여받은 엄청난 무슬림들이 침투하고 있고, 그들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사회는 조만간 이슬람국가가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테러와 분쟁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라는 전제를 믿는다.

그러한 증거로 이들은 이슬람과 관련된 수많은 테러와 국제분쟁 현상을 들고 있는데, 이런 주장의 특징은 모든 국제분쟁의 원인을 일방적으로 이슬람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진정으로 유대인들과 이웃으로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갈 방법을 찾기를 바라는가?…서양 열강들은 팔레스타인과 유대인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고 늘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무슬림의 시각에서는 어떤 협상도 받아들일 수 없다.…이스라엘에 대항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싸움은 이슬람교 고위 권력자들에 의해 지원을 받고 있다."(앞의 책, 마크 가브리엘)

무슬림이었다가 기독교인이 된 마크 가브리엘은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며 무슬림이 이교도들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증오심을 강조한다. 반면, "나는 결국 유대인 대부분은 무슬림을 증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대인 대부분은 그저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고 말하며 유대-팔레스타인 분쟁은 기본적으로 무슬림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공격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미있게도 그는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근거자료를 '이스라엘 외교부 정보국'에서 가져왔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271, 278쪽). 그러나 나 자신도, 많은 시사 전문가들도 사태를 그렇게 단순하고 일방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들이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결혼식 파티 현장을 폭격해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에 각주를 달면서 '미군이 뜻하지 않게 결혼파티를 공격한 슬픈 사건'(269쪽)이라고 평해, 그의 시각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증명한다. 나 역시 앞서 말한 그 모임에서 이슬라모포비아를 주장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의 테러들을 단순히 이슬람의 공격주의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수차례 들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보는 서방의 입장과 시각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서방=기독교, 이스라엘=한국 기독교'라는 기본적인 등식을 믿기 때문이다. 적대적인 원수(이슬람)라고 여겨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면서도 자신들의 비슷한 과오는 좀처럼 인식하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역사상 기독교권은 다른 종교 및 문화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성지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된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이나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를 믿는 동방정교 형제들조차 학살하고 약탈하는 죄를 저질렀다. 30년 종교전쟁(1618~1648년)으로 독일 인구는 3000만에서 1200만으로 감소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고, 중세의 마녀사냥은 사상통제의 수단으로 광범하고 잔인하게 행해졌으며, 근대의 서방 선교는 제국주의적 수탈과 함께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또한 20세기 이후 계속되는 수많은 중동 분쟁들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제국주의적 강점 탓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슬람의 공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사코 이슬람과 무슬림의 호전성에서만 원인을 찾는다. 이 주장의 끝으로 가면 결국,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샤리아의 통치를 받을 경우, 여성인권의 소멸, 범죄에 대한 가혹한 처벌, 언론·집회·결사·개종 등 기본적인 자유의 제한, 이교도에 대한 탄압과 끊임없는 이슬람 지하드식 테러 등…모든 방면에서 인권소멸과 폭력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샤리아란 무엇인가?, 지오딘 사다르>)

이러한 태도들은 세계사와 종교사의 지극히 기초적인 상식조차 안중에 없는 것이다. 내 종교를 두둔하기 위해 기본적 사실관계에조차 눈감으려는 것은 진정한 신앙심이 아니다. 사울과 같이 무반성적으로 자기종교에 대해 열정만 보인다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아니다(행 9:1~2).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이지, 우리를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 정말 이슬람의 방식이 틀렸다면 우리는 그들의 방식을 흉내 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 방식을 붙들어야 한다.  
 
3. 잘못된 성경의 적용은 판단력을 흐린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이슬라모포비아의 증언을 전면 부인할 마음은 없다. 내가 알기에도 이슬람 경전은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적대성을 명령하는 부분이 결코 적지 않다. "어디서든 이교도를 발견하면 그들을 붙잡아라, 포위하라, 죽여라. 그리고 모든 매복 장소에서 기다려라. 하지만 그들이 회개하고…실행하면 그들을 풀어주어라. -코란 9장 5절" "알라 이외의 다른 신을 숭배하는 다신교와 불신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종교가 모두 유일신 알라께로 귀일할 때까지 싸워라. -코란 8장 39절"(앞의 책, 마크 가브리엘) "너희들이 만난 장소에서 그들(믿지 않는 무리)을 죽여 버려라. 그들이 너희들을 쫓아낸 장소에서 그들을 쫓아내 버려라. -코란 2장 191절"(<코란>, 토마스 어버크론비, 태종출판사)

그러나 아무리 '우리 편끼리지만', 그래도 기준은 동등해야 한다. 구절 자체만 따지고 보면, 성경이 보이는 배타성과 적대성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신 7:16)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 6:21)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 15:2, 3)

물론 이 자리에서 길게 논할 수는 없으나, 나는 이 구절이 표면적인 배타성을 넘는 보편적 가치가 있음을 안다(졸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신앙말하기> 참조). 그러나 경전구절 자체가 주는 이미지만 놓고 그 종교의 배타성과 공격성을 말한다면 성경도 곤혹스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약법의 불완전성을 극복한 신약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데, 예수님은 오직 사랑의 복음만 전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기 구원문제에 관해서는 구약 율법이 아닌 은혜의 복음에 감사하면서도, 유독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구약율법을 들어 정죄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특히 기독교근본주의자들에게 구약율법은 여전히 불신자들을 적대할 수 있는 근거구절로 애용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으로 분명히 믿는 기독교 목사다. 그럼에도 하나의 종교현상으로서 기독교·이슬람교·유대교는 가장 위험한 지경까지 다다를 수 있는 매우 민감한 종교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음이 세상에 참된 구원과 평화를 가져올 복된 소식임을 믿지만, 동시에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들이 참된 구원과 평화를 깨는 걸림돌 역할도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믿는 신을 유일하게 참된 신이라 믿고, 그 경전을 절대화하여 자신들의 극단적 행동까지 정당화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슬라모포비아가 주장하는 이슬람의 적대성·배타성이 어느 정도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의 배타성에서 오히려 우리 배타성과 공격성을 보아야 한다. 나는 이슬라모포비아의 주장에서 이슬람 근본주의를 빌미로 기독교 근본주의, 시온주의(유대적 근본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우리 안에 고이 품고 있는 타종교에 대한 증오와 적대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 그들 역시 "기독교인·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코란의 가르침이 옳다는 교훈만 더 얻게 될 것이다.

   
 
  ▲ 이슬라모포비아 같은 공포와 두려움에 기반한 마녀사냥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과 사랑을 굳게 잡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는 걸 믿어야 한다.  
 
4. 오직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만이 두려움을 이긴다

소수(약자)가 갖는 피해의식은 테러를 낳지만, 다수(강자)가 갖는 피해의식은 마녀사냥을 낳는다. 약자는 대적과 정당하게 붙어 이길 승산이 없기에 몰래 숨어 타격하는 테러(비정규전)에 의존한다. 반면 강자는 정규전으로 제압하려 한다. 그런데 그게 갈수록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쓰는 전략이 다수의 불안 심리를 부추겨 대적을 고립시키는 '마녀사냥'이다. 히틀러는 1차 대전 후 패전의식에 사로잡힌 독일국민들을 다시 고취시키고, 자기가 제시하는 목표에 헌신하게 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우수한 게르만 민족의 정신을 갉아먹는 해충이다. 유대인들은 적과 내통하여 독일을 팔아넘길 것이다."는 의식을 퍼뜨려 마녀사냥에 나섰다.

지난 60여 년 동안 우리민족은 "빨갱이"와 "미제의 앞잡이"라는 마녀를 잡는다는 빌미로 모든 백성들을 냉전의 세계로 몰아넣어 왔다. 미국 주류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과 <미국>이라는 저서를 통해 다른 문명, 그 중에서도 이슬람이 미국의 전통적 가치에 충돌하는 대적이 될 것이라고 설파했고, 상당수 미국인들은 그런 시각을 수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슬라모포비아의 주장에 설득력 있는 부분이 간혹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기독교선교 지형에서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슬람에 공포심을 극대화하여 힘으로 제압하려는 또 다른 마녀사냥의 징후로 보인다. 이슬라모포비아는 기본적으로 미국 기독교근본주의의 자료를 채용해 한국선교운동에 활용하려는 전략이다.

굉장히 역설적인 사실은 지금 기독교는 다수요 강자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현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현실 기독교를 대변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종교 지형상 결코 적지 않은 20%가 개신교인이며, 10명의 대통령 가운데 무려 3명이 장로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뭔가 모를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 쫒기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저들이 언젠가 나를 이기고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라는 공포심과 피해의식이 바로 막연한 다수의 두려움을 자극해 소수를 억압하게 하는 '마녀사냥'의 근거가 된다(출 1:9~16). 그 힘이 진리로부터 기초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우려가 과장인가? 지금 막연한 공포심 가운데 확산되고 있는 이슬라모포비아가 우리사회에 널리 퍼질 때, 이제 우리는 일상에서 쉽게 마주치는 평범한 아랍사람들, 무슬림들을 보면서도 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저들은 우리를 이슬람화하려는 훈련된 종교간첩들이다.', '혹시 저 가방에 폭탄이 들어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 사회는 남북 간, 경제적 격차뿐 아니라 종교 사이에도 지금껏 유지된 공존의 틀이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위험한 시기에 접어들었다. 안타깝게도 그 선의의 경쟁 질서를 깨뜨릴 가능성이 가장 큰 종교는 솔직히 우리 개신교다. 적극적 전도운동에 그치지 않고, 장로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나서고, 급기야 기독교 기득권을 지향하는 정당까지 시도하는 등 급격한 정치세력화에 힘쓰고, 이제 이슬라모포비아까지 확산시키다가는 결국 종교들 사이의 불문율들이 깨지고 각 종교 간 힘겨루기와 세력화가 본격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사회는 '개신교 대 비 개신교'로 나뉘어, 극한의 투쟁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심한 비약인가?

바른 길은 하나다. 정말 이슬람의 방식이 틀렸다면 우리는 그들의 방식을 흉내 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 방식을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슬람을 공포로 볼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성도 함께 보고 진정한 회심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한 자들에 대해 힘으로 정복하지 않고, 당신이 대신 죽는 방식을 취하셨다. 이슬라모포비아 같은 공포와 두려움에 기반한 마녀사냥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과 사랑을 굳게 잡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는 걸 믿어야 한다. 우리의 십자가 복음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겸손과 사랑만이 유일한 무기다.(벧전 3:15~16)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구교형 / 성서한국 사무총장

-본 글은 <뉴스앤조이> 종이신문 제82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