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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유주의: 참여정부의 이념성향

강산21 2008. 12. 23. 12:02

사회자유주의: 참여정부의 이념성향

 

복현콜로키움 강연

2008. 12. 11 유시민

 

1.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조건

 

-어떤 정부의 이념적 성격 규정을 위해서는 집권세력의 주관적 지향과 아울러 그 정부가 처해 있던 현실적 조건과 상황을 함께 보아야 한다.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는 진보적 지향을 지닌 정부가 보수의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있으며, 진보적 지향을 실현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에도 그 목표와 정책수단을 제약 당한다.

 

-실제로 나타난 정책은 집권세력의 이념적 지향과 현실 제약조건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 집권세력의 주관적 지향만을 보거나 결과적으로 시행된 정책 중 어느 하나만을 근거로 삼아 어떤 정부의 이념성향을 판단하는 것은 동전의 한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불합리하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는 진보 정부였지만 외환위기로 인해 강요받은 개방과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일정 부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참여정부도 이와 유사한 조건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2.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

 

-참여정부의 이념은 사회자유주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참여정부는 분명한 자유주의적 기조를 지니고 있었다. 시민의 자유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정경유착과 권언유착 등 권력카르텔을 해체함으로써 헌법 규정에 부합하는 권력의 민주화와 분권화를 추진했다. 해묵은 권위주의 문화를 청산하는 동시에 기업에 대한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자의적 개입을 극소화했다. 시장경제라는 국민경제의 기본질서를 확고하게 승인했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을 비준했으며 한미FTA를 체결하는 등 자유무역 확대에도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참여정부의 자유주의 성향을 분명하게 보여준 정책이었다.

 

-참여정부는 동시에 사회적 형평과 사회통합, 그리고 기회균등을 이루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확대 강화했다. 과거사 진상규명과 국가의 사과, 신행정수도 건설과 지역균형발전정책, 노사정위원회와 저출산 고령사회 연석회의, 투명사회실천협의회 등 사회적 대타협을 위한 기구 신설과 강화 노력, 국가사회지출의 대폭 확대, 노인장기요양보험과 기초노령연금 도입, 아동과 장애인 지원 확대, 교원 확충, 종부세 등 보유세 강화와 강력한 부동산 거래와 신용 규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런 정책에서 참여정부의 진보적 성향은 뚜렷이 나타났다.

 

-진보는 보수와 달리 비군사적 수단에 의한 국제분쟁 해결을 선호한다. 참여정부는 전시작전권을 환수함으로써 한반도 정세에 대한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한국의 동의가 없는 미국의 대북 군사조처에 단호하게 반대했으며 북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파문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던 남북 평화번영을 계승 발전시켰다. 자이툰 부대 이라크 파병은 한반도 평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한미관계가 장애를 조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을 뿐이다.

 

-사회자유주의는 우리 헌법이 규정한 정치와 경제의 다원주의적 자유주의적 기본질서를 전적으로 승인하는 가운데 사회적 형평과 통합, 기회 균등과 경쟁의 공정성, 사회적 안전과 평화, 환경보호 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인 국가의 개입과 사회적 타협을 추구하는 사상적 이론적 흐름을 표현한다. 이것은 전통적인 보수와 진보를 인정하면서 그 장점을 취하는 중도통합 또는 중도진보적 이념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3. 현실의 제약과 역량의 부족

 

참여정부는 사회자유주의 성향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못했으며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했다는 진보세력의 비판은 정치적 동기를 가진 의도적 왜곡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 가진 경직된 이념과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참여정부가 ‘좌익포퓰리즘’에 사로잡혀 성장을 도외시하고 분배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국가경제를 망쳤다는 보수세력의 비판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정치적 비방이자 모략인 동시에 그들의 편협한 이념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 현실적 제약

 

 

참여정부가 직면했던 가장 중요한 현실적 제약은 세 가지였다. 한국경제의 내부구조 결함, 보수 편향의 담론시장, 그리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이 그것이었다.

 

(1)경제양극화

 

대기업/중소기업, 수출/내수, IT/비IT의 격차 확대에서 나타나듯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국민경제의 유기적 통합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수출대기업의 글로벌 소싱으로 trickle-down-effect가 약화되면서 ‘고용 증가 없는 성장’과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의 고착화’ 현상이 나타났다. 일자리가 신규 진입 노동력을 흡수할 만큼 빠르게 늘어나지 못하고, 제조업 일자리 감소로 요식업 등 자영서비스업의 구조적인 공급과잉 현상이 심화되면서, 국민들은 단기간에 효과가 나는 성장정책을 요구하게 되었다. 참여정부는 단기적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고 실제 고용 창출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회적 해법을 강구했지만, 국민들은 이런 제안에 만족하지 않았다.

 

(2)보수편향의 담론시장

 

소수의 거대 보수신문들은 한나라당과 재벌, 보수지식인 집단과 손잡고 사회자유주의의 ‘사회’적 측면에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집중함으로써 정부를 국민에게서 이념적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세금폭탄론’ ‘좌익포퓰리즘론’ ‘대북 퍼주기론’ ‘잃어버린 10년론’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반면 상대적으로 미약한 진보언론은 사회자유주의의 ‘자유주의’에 비판의 화살을 집중했으며, 그들이 펼친 ‘참여정부 신자유주의 비판’은 결국 보수세력의 ‘잃어버린 10년론’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참여정부를 세차게 공격했던 진보세력이 참여정부와 함께 몰락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한다.

 

(3)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부시행정부의 독선적 일방주의적 군사외교정책이 국제사회를 압도하면서 참여정부는 사회자유주의에 걸맞는 한반도 평화주의 정책을 채택하기 어려웠다. 이라크 파병은 이런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받아들인 최소한의 조처였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거부, 북한의 금융자산 동결, 북한인권법 제정, 대량무기확산방지를 명분으로 한 공해상의 북한 선박 검문, 경수로 건설 중단 등 군사적 경제적 고립과 압박에 맞서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과 핵실험을 감행하는 등 역시 군사적 수단으로 반발함으로써 몇 차례나 위기가 야기되었다. 그 결과 6.15선언을 이행하는 개성공단 건설 등 성과가 있었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러 10.4합의를 도출했지만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정착은 비약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2)역량의 부족

 

참여정부의 주체적 역량은 이러한 제약조건을 극복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사회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를 만들어 가기에 부족했다. 역량 부족은 몇몇 측면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1)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

 

힘이 아니라 말과 논리로 국정을 운영하는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이 적대세력의 집중적 공격목표가 됨으로써 국민과 정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서적 토대가 파괴되었다. 대통령은 ‘재래식 살상무기’를 버리고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가운데 전쟁에 나섰다. 검찰, 국정원, 감사원, 국세청을 모두 청와대에서 독립시켰고, 야당과 보수세력의 거센 정치공세에 시달리면서도 이러한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힘을 사용하는 대신 말을 사용하는 전투에서 대통령이 야당과 보수언론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분하게 정책에 대해 국민과 대화할 통로가 없는 가운데 대통령의 모든 말이 거두절미 왜곡되어 보수세력의 ‘정권살상용 실탄’으로 재활용되었다. 마치 변변한 방어용 무기 없이 전쟁에 나선 지휘관처럼 대통령은 보수신문과의 ‘전쟁’에서 참패했고, 참여정부는 이로 인한 정서적 고립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한 가운데 끝이 났다.

 

(2)정치세력

 

사회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를 마련하여 국민을 설득하고 입법을 해나갈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한때 국회 과반수 의석을 가졌지만 사회자유주의 노선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견지하려는 세력은 여당 내의 매우 미약한 소수정파에 지나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미국 민주당처럼 보수적 자유주의와 중도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세력이 제휴한 연합정당이었다. 그런데 대통령 국정지지도가 하락하면서 연합정당으로서 열린우리당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제도적 절차적 정치적 원칙이 모두 무너졌다. 그러자 대통령은 몇몇 국정과제위원회와 청와대 참모, 일부 장관, 그리고 관료들의 도움으로 사회자유주의적 정책조합을 만들고 추진했다. 국가비전 2030이 작성 발표된 과정, 그리고 이것이 당시의 집권여당에 의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거부되고 결국 실종되는 과정은 그것을 체현하는 강한 정치세력이 없이는 어떤 정부의 정책 지향성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입증한다.

 

(3)정치적 기반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던 소위 호남+진보세력의 민주대연합을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노무현 대통령의 개인적 매력을 덧붙임으로써 탄생할 수 있었던 정부이다. 개인적으로 볼 때 뚜렷한 사회자유주의 성향을 지닌 노무현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은 매우 작았다. 그런데 대통령의 자유주의적 통치기조가 이 연합을 크게 약화시켰다. 대북송금 특검법을 수용한 대통령의 조처는 호남 지역기반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반면 보수진영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나라당의 영남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는 실패했다. 다른 한편 신행정수도 건설과 강력한 지역균형발전 정책, 그와 연계된 수도권 규제는 서울 경기 중산층 유권자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역량이 부족한 중도정권은, 그것이 중도진보든 중도보수든, 좌우 양쪽에서 오는 이념적 공격에 취약하다. 역량이 크면 통합에 성공해 좌우 극단주의를 소수파로 만들 수 있지만 역량이 부족하면 협공에 밀려 소수파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참여정부는 후자의 케이스가 되었다.

 

4. 사회자유주의의 미래

 

어떤 정치이념이든 대변할 수 있는 확고한 정치세력을 얻지 못하는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양당제 국가, 그것도 영호남이 각각 보수 진보와 친화성을 지니고 지역적으로 분할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회자유주의라는 중도진보적 정책노선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획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유주의자, 사회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가 한 지붕 아래 공존 경쟁하는 미국 민주당에서 사회자유주의 성향의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된 데서 보듯, 우리나라에서도 자유주의와 사회자유주의, 사회주의가 하나의 정당 안에 공존 경쟁하면서 보수 한나라당과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독일식 선거제도가 실시된다면 당연히 독자적인 정당으로 활동하면서 다른 자유주의 정당이나 진보정당과 연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는 두 길이 다 막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길은 보수 자유주의 다수파가 열린우리당이라는 연합정당을 파괴함으로써 봉쇄되었다. 사회자유주의자들은 오늘의 소수파가 내일의 다수파가 될 수 있는 규칙을 허용하지 않는 정당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은 사회자유주의 성향의 유권자들에게서 다시는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 정당이 반보수대연합을 형성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자유주의-진보 연합정당이 예측가능한 미래에 출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두 번째 길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봉쇄하고 있다. 각각 배타적 지역기반을 보유한 이 정당들은 현행 선거제도가 만들어낸 기득권집단이다. 다당제와 연합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연합정당이 만들어질 가능성보다 더 낮다.

 

두 갈래 큰 길이 다 봉쇄된 상황에서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독자적인 사회자유주의 정당을 만드는 방법이 남아 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과 비슷한 길을 가는 방법이다. 사회자유주의 정책노선의 대중적 수용성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보다는 수월할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척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시도가 어느 정도라도 성공한다면 일종의 ‘정치적 치킨 게임’을 할 수는 있다. 민주당,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사회자유주의 정당의 각개약진이 명백하게 자유주의-진보세력의 선거 참패를 초래할 것임을 예견할 수 있다면, 그때는 보수 자유주의 정당과 사회자유주의 정당, 진보정당들의 선거연합이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