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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의 사연많은 자살들 <경성자살클럽>

강산21 2008. 7. 30. 10:48

<근대 조선의 사연많은 자살들>

기사입력 2008-07-30 06:30
'경성자살클럽' 출간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2005년 통계청 자료 기준으로 5살 이상 인구 10만명당 자살사망률이 26.1명에 이른다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한국의 자살사망증가율이 가장 빠르다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자살자가 많았던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던 듯 싶다. 근대 조선의 자살사건을 다룬 책 '경성자살클럽'(살림 펴냄)을 쓴 전봉관 카이스트 교수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 "근대 조선시대 신문 사회면에 자살 소식이 실리지 않은 날이 드물 정도로 많이들 자살했고 사연도 다양해 각각의 유형을 대표하는 사건들만 엮어도 책 한 권은 너끈히 나올 것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책에는 전 교수의 말대로 다양한 사람들의 자살 사연이 등장한다. 그 중 근대 조선의 '입시 지옥' 때문에 세상을 등져야 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과 놀랄 만큼 닮아있다.

1925년 3월15일 오전 경기 부천 계남면의 한 야산에서 교복 차림의 청년이 나뭇가지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청년의 교복 주머니에는 466번이라는 수험번호가 적힌 경기도사범학교 수험표 한 장이 구겨진 채 발견됐다.

경기도사범학교 입시 담당자는 466번 수험생이 서울 옥천동에 사는 19세 청년 이인복이며 이번 입시에 불합격했다고 확인했고 이날 조선일보에는 '시험에 낙제하고 청년 학생 자살'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한 달 후인 4월 11일 밤에는 서울 가회동에 사는 19세 여학생 정국만이 한강 인도교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했다. 정국만은 그 해 3월 이화학당 시험에 떨어진 뒤 수치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 결국 자살을 결심했으나 다행히 미수에 그쳤다.

조선의 입시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게 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밥을 굶을지언정 자식은 학교에 보내야 된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 갔지만 학생들을 수용할 교실은 태부족이었다.

이 때문에 192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조선에서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도 입시를 치러야 했다.

1936년 서울 시내 25개 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입학정원은 4천800여명이었지만 지원자는 1만21명에 달했다. 시험에 떨어지면 재수, 삼수를 하기도 했지만 10살이 넘으면 '학령(學齡)초과'를 이유로 시험 치를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심각한 입시 경쟁의 폐해로 신학기가 시작되는 4월이면 입시 후유증으로 수십 명의 청소년들이 자살하거나 비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황당한 시험문제도 등장했다. 1935년 서울의 한 공립보통학교는 100원짜리 지폐를 꺼내놓고 '이게 얼마짜리 지폐냐'를 문제로 냈다. 당시 교사 한 달 월급이 50원 내외이던 시절에 중산층 이하의 가정에서 자라난 예닐곱 살 아동들이 이 돈을 봤을 리는 만무한 일. 이 문제는 부잣집 아이를 걸러내기 위한 시험문제로 당시 '유전입학 무전낙제'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책은 이 밖에도 해방 이전 조선에서 치정(癡情)이나 집단 따돌림 때문에 일어난 사건에서 종로경찰서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던 독립운동가 김상옥과 나석주의 자결에 이르기까지 10가지 자살사건을 통해 근대 조선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312쪽. 1만2천원.

zitron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