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글 좋은글

새벽이 올 때까지

강산21 2002. 4. 4. 15:20
새벽이 올 때까지

민희 아빠는 다니던 직장을 잃은 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조그만
음식점을 시작했다. 하지만 음식점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그만 두어
야 한다고 했다. 생각보다 손님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망하나로 시
작한 음식점이 실패하자 아빠는 하루하루 마른 꽃잎처럼 시들어 갔다..
민희네 가족은 조그만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변두리 산동네로 이
사를 해야만 했고 민희 아빠는 이사온 후부터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예전처럼 민희와 동생을 대해주지 않았고 웃음마저 잃어 가는 듯했
다 새벽녘 엄마와 함께 우유배달을 마치고 돌아와도 아빠는 온종일 어
두운 방안에만 있었다. 공부를 방해하는 남동생 때문에 민희가 공부방
을 조를 때마다 아빠는 말없이 아픔을 삼킬 뿐이었다. 하루는 남동생이
다 떨어진 운동화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 왔다. "엄마 아이들이 내 운동
화보고 뭐라는 줄 알아? 거지 신발이래, 거지신발!"
아빠는 이런 일이 있는 날이면 늘 엄마로부터 천 원짜리 한 장을
받아들고 술 한 병을 사 가지고 들어 왔다, 그리고 곰팡이 핀 벽을 향
해 돌아앉자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산동네로 이사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밤늦은 시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동네 조그만 집들을 송두리째 날려보내려는 듯 사나운 비
바람도 몰아쳤다. 칼날 같은 번개가 캄캄한 하늘을 쩍 하고 갈라놓으면
곧이어 천둥소리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비 오는 날이 계속되면서 곰
팡이 핀 천장에는 동그랗게 물이 고였다. 그리고 빗물이 한 방울씩 떨
어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빗물이 방울져 내렸다. 민희 엄마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걸레대신 양동이를 받쳐놓았다. "이걸 어쩌나
이렇게 비가 개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손을 좀 봐둘 것을 그랬어요."
엄마에 말에 돌아누운 아빠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아빠는 몇 일
전 우유배달을 하다가 오토바이와 부딪쳐 팔을 다쳐 며칠째 일도 못하
고 있었기에 아픔은 더욱 컸다.
아빠는 한 손에 깁스를 한 불편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에게 천원을 받아 들고 천둥치는 밤거리를 나섰다. 그런
데 새벽 한시가 넘도록 아빠가 들어오지 않아 엄마와 민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창밖에 서는 여전히 천둥소리가 요란했고 밤이 깊을수록 점
점 더 불안해졌다. 엄마와 민희는 우산을 받쳐들고 대문 밖을 나섰다.
아빠를 찾아 동네 이곳 저곳을 헤맸지만 비바람 소리만 장례행렬처럼
웅성거릴 뿐 아빠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민희는 자신에 눈을 의심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는 분명 아빠였다. "엄마...저
길 봐..." 아빠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서 온몸으로 사나운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다. 깁스한 팔을 겨우 가누며 빗물이 새는 깨어진 기와 위에
우산을 바치고 있었다. 비바람에 우산이 날아갈까 봐 한 손으로 간신히
우산을 붙들고 있는 아빠에 모습이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민희가 아
빠를 부르려고 하자 엄마는 민희의 손을 힘껏 잡아 당겼다. "아빠가 가
엾어도 지금은 아빠를 부르지 말자 너희들과 엄마를 위해서 아빠가 저
것마저 하실 수 없다면 더 슬퍼하실 지도 모르잖아 "엄마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빠를 바라보는 민희 눈에도 끝없이 눈물이
흘러 내렷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가난을 안겨주고 아빠는 늘 아파했
다. 하지만 그 날밤 아빠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들의 가난을
아슬아슬하게 받쳐들고 있었다. 아빠는 가족들에 지붕에 되려고 했던
것이다. 비가 그치고 하얗게 새벽이 올 때까지...
<연탄길2 / 삼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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