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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바뀌자 유배 떠난 '외교부 탈레반'

강산21 2008. 6. 27. 08:55

정권 바뀌자 유배 떠난 '외교부 탈레반'
[월간 말]
기사입력 : 2008-05-26 15:46:39
최종편집 : 2008-06-03 09:12:00

 

“우리나라는 관료국가야.”
6월 퇴임을 앞둔 한 정부 산하기관 단체장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는 ‘관료국가’라고 정의내렸다. 관료들이 모든 행정과 업무를 좌지우지한다는 뜻이다. 정치인 출신이나 전문가들도 관료들과 타협을 하지 않는 이상 버텨내기가 어렵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런 관료사회에서 한 번 ‘배신자’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당사자로서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한다. 때문에 그들에게 협력하거나 또는 퇴출당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을 지켜 줄 든든한 ‘빽’이 있어야 한다.


외교통상부, 그중에서도 북미국 출신은 대표적인 관료사회로 꼽힌다. ‘마피아’란 무시무시한 별칭을 달고 있을 정도이니 그 위세를 어림짐작해볼 만하다. 마피아란 별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니란 것은 그들의 행보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국익’이 아니다. 자기 조직의 이익이다.


그리고, 배신은 곧 죽음이다. 배신의 범주는 자기 조직의 비밀을 누군가에게 누설하거나 이익에 반하는 행동 모두를 포괄한다. 조직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는 철저한 보복과 응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찍히면’ 죽는다.

 

2004년, ‘외교부 투서 파문’


지난 4월 23일 이명박 정권과 친밀한 한 중앙일간지에서 “사고 친 ‘친노 외교관’ 2명 징벌성 인사”라는 제목의 짤막한 기사를 내보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폄하 발언 투서사건과 문서유출 파문 등을 일으켰던 친노(친 노무현) 성향 외교관 2명이 금명간 있을 재외공관 인사에서 최하위 등급에 해당하는 공관으로 전보될 것으로 23일 알려졌다”는 것. 이 신문은 “대상자는 이른바 ‘외교부 탈레반’으로 불렸던 이종헌 전 조약과장과 김모 서기관 등 2명”이라고 소개했다. 외교부 관계자가 “두 사람은 18일 열린 인사위원회에서 근무여건이 가장 열악한 ‘특수지’ 공관 발령이 내정된 상태”라며 “근무 기강을 흩뜨리는 사건의 재발을 막는 차원의 징벌성 좌천인사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고도 보도했다.


특수지는 생활환경이 열악하고 치안이 불안해 외교관의 신변에 위험이 가해질 수 있는 지역을 뜻한다.
김 서기관은 2004년 초 정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외교부 투서 파문’의 주인공이고, 이 전 조약과장은 2006년 초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한 NSC 문건 유출의 당사자다.


그런데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이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내어 ‘징벌성 좌천인사’라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당시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았던 2003년 12월말, 외교부 중에서도 핵심인 북미국 라인 인사들이 회식 도중 노무현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파문의 주인공은 조현동 외교부 북미 3과장. 그는 외교부 직원들에게 노 대통령과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청와대 내 386세대 보좌진들을 일컬어 “영어도 못하고 미국에도 안 가본 사람들이 대미외교를 제대로 하겠느냐”, “NSC의 386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한미관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선 “김정일 호감세력이 노무현 대통령 지지층이라는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의 최근 발언이 있었는데 맞는 말 아니냐”,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기면 대통령은 해양부와 과기부만 맡으면 된다”는 등의 말도 오고 갔다.


자칫 묻힐 뻔한 이런 사실은 한 외교부 직원이 청와대에 투서를 넣으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발끈한 청와대는 민정수석실을 통해 진상조사를 강도높게 벌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제가 된 발언 가운데는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이기면 노무현 정권은 다 끝날 것이며, 외교부는 한나라당의 지시를 받아서 일을 하면 된다’는 취지의 심각한 발언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조사 결과 여러 명의 외교부 관계자가 회의석상, 사무실, 회식자리 등 공·사석에서 반복적으로 문제 발언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민정수석실은 조사 결과와 함께 문제 발언을 한 조현동 과장 1명 이상의 외교부 관련자에 대해 적절한 징계조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이들을 두둔했던 윤영관 외교부 장관과 위성락 북미국장이 사실상 경질됐고, 파문의 주인공 조현동 과장은 물러나야 했다.


투서를 넣은 당사자가 바로 김아무개 서기관이었다. 보수언론들은 이 사건을 청와대 내 ‘자주파’와 외교부 내 ‘동맹파’의 갈등으로 규정하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006년, ‘NSC 문건 유출’


2006년 2월초, 당시 최재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전략적 유연성 합의를 둘러싼 NSC 내부 문건을 공개했다. 2005년 4월 5일에 작성된 ‘국정상황실 문제제기에 대한 NSC 입장’이라는 11쪽짜리 문건은 청와대 국정상황실이 노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 대한 NSC의 해명 자료다.


국정상황실 보고서는 ‘외교부와 NSC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내용의 각서를 교환하고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NSC는 이 문건에서 “2003년 10월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5차 회의를 계기로 위성락 당시 북미국장이 미국 측에 교환각서 초안을 전달한 것을 노 대통령과 NSC에 보고하지 않고 추진했다”고 밝혔다.
이 문건은 이어 “NSC는 각서 교환 사실을 2004년 3월 후임 김숙 북미국장에게서 보고받고 인지했다”며 “NSC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책임은 인정하지만 이는 외교부의 보고 누락이 1차적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NSC의 표현대로라면 전략적 유연성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각서 초안을 교환하고도 대통령에게 5개월 동안이나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당시 국정상황실 보고서는 외교부와 NSC가 제대로 보고하지 않는 바람에 2005년 3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노 대통령이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을 미국 측이 기존 합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지적했다.
최 의원이 NSC 내부 문건을 공개하면서 청와대는 다시 한 번 발칵 뒤집혔다.


보수언론들은 이 사건을 이종석 NSC 사무처장을 중심으로 한 ‘온건자주파’와 ‘강경반미자주파’의 대결로 규정하면서 문건 유출 책임자를 색출해 엄중히 문책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문건에서 드러난 전략적 유연성 협상의 문제점은 아예 사라졌다.


이 문건을 최 의원에게 보여준 것이 이종헌 NSC 행정관이었다. 이 행정관은 그해 1월 23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전 청와대 행정관과 최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문건인 NSC 상임위 회의자료를 보여줬고, 최 의원은 현장에서 필사를 했다. 이 행정관은 청와대 조사에서 “최 의원이 발표를 하기 위해 필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참고자료로 쓰기 위한 것으로 인식하고 제지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행정관에게 문건을 복사해준 청와대 제1부속실 이성환 행정관은 공교롭게도 이태식 주미대사의 아들이었다. 대표적인 북미국 출신 인사인 이 대사의 후광을 입은 탓인지 그는 영어통역직에서 교체된 것과 ‘구두 경고’를 받은 것 외에는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다.


반면, 이 행정관은 정직 3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미운털이 박히자 인사상 불이익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이 행정관은 정직 3개월이 끝났음에도 2개월여간 아무런 보직도 받지 못한 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 뒤에도 그는 특별한 직제 없이 외교역량평가개발센터(ADC)에서 업무지원 형식의 임무를 받아 근무하다 2007년 1월 9일 뉴욕총영사로 발령됐다. 말이 발령이지, 실제로는 명백한 좌천이었다. 부이사관급이던 직급이 과장급으로 격감됐고, 봉급도 깎였다. 이같은 조치는 외교공무원으로서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한마디로 ‘옷을 벗으라’는 압력이었다.


이 두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2년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공통점을 갖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초기인 2003년과 2004년에 벌어진 미국과의 주요한 협상을 둘러싼 청와대와 외교부 내의 갈등이 표면화됐다는 점이다. 이라크 파병과 용산미군기지이전협상, 전략적유연성 합의가 그때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물론, 미국과의 모든 협상을 총괄한 것은 북미국 라인이었다.
용산기지 이전협상은 2003년 무렵 실무라인에서 마무리단계에 이르렀는데, 미국과의 협상을 주도했던 외교부 북미국 라인에서는 이를 ‘소파(SOFA)문서’로 처리하려고 했다. ‘협정’이 아닌 소파문서로 처리할 경우 국회 비준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전략적유연성, 즉 주한미군 역할변경과 관련해서도 북미국 라인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미국측에 ‘양해각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전략적 유연성 합의는 한반도 안보지형을 뒤바꾸는 중차대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런 밀실 협상에 대한 내부 문제제기는 사사건건 차단 당했다.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던 이 행정관이 이런 사실을 담은 2005년 4월 청와대 NSC 문건을 최 의원에게 유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투서 파문도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현직 대통령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북미국 라인의 잘못된 행태를 고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 화려한 복귀와 ‘처절한 응징’


2008년, 정권이 바뀌자 북미국 출신 인사들은 속속 ‘화려한 복귀’를 했다.
투서파문 사건으로 경질된 이후 국방대학원 연수를 거쳐 주 인도네시아 대사관 참사관으로 일해오던 조현동 전 과장은 청와대 외교안보비서실 3급 행정관으로 돌아왔다. 당시 경질된 위성락 북미국장의 후임으로 전략적 유연성 합의를 이끌었던 김숙 전 북미국장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으로 돌아왔다. 이 행정관의 징계 당시 징계위원회를 주재했던 유명환 1차관은 외교부 장관이 됐다. 이태식 전 대사도 주미대사로 복귀했다.


이들의 화려한 복귀는 ‘처절한 응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외교부는 4월 18일 인사위원회를 열어 ‘조직’의 안위를 위협했던 ‘배신자’들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그 결과, 김아무개 서기관은 아프리카 수단으로, 이 행정관은 앙골라 대사관으로 발령을 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반발이 일었다. 김아무개 서기관이 근무하고 있는 주 우크라이나 대사관 직원들이 ‘보복성 인사’라며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주 우크라이나 대사는 직접 박준우 외교부 기획관리실장 앞으로 업무연락을 통해 “인사 발령 시도는 자원외교 인원재배치를 표면에 내세운 보복성 인사이고,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자발적으로 외교부를 떠나게 하려는 시도인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며 “과거를 문제 삼아 부당한 인사조치를 하려면 외교부 내에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만들어 문제가 있었던 직원 전원을 출부시키기 바란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그는 “이번 인사에 인사라인 이외의 외부입김이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도 했다.


외교부의 인사조치는 엉뚱한 곳에서 큰 파문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김아무개 서기관의 아내가 현 정권 최고위층 자녀와 두터운 친분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자연히 정권 최고위층으로부터 압박이 들어갔고, 외교부는 발칵 뒤집혔다. 결국, 김아무개 서기관의 아프리카 수단 발령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이 행정관은 주 앙골라대사관 참사관으로 발령이 확정됐다. 정직3개월과 2개월 미발령 대기, 뉴욕총영사관으로의 좌천에 이은 세 번째 ‘중징계’다. 그 사이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관료’는 바뀌지 않았다.


‘친노’도 ‘강경탈레반’도 아니었던 이 행정관이 잘못한 게 있다면, 외교관으로서 ‘국익’을 위해 거대한 관료집단에 맞서 싸웠다는 것 뿐이었다. 이게 ‘관료국가’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