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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강행’도 미국 요구대로, “내용 바꿀땐 재수렴” 법 절차도 무시

강산21 2008. 6. 26. 13:35
‘고시 강행’도 미국 요구대로
미 “QSA 내주는 대신 고시확정” 주장때문
“내용 바꿀땐 의견 재수렴” 법 절차도 묵살
한겨레  김진철 기자 최익림 기자 성연철 기자
»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왼쪽)이 25일 오후 미국산 쇠고기가 보관돼 있는 경기 광주 장지동 삼진글로벌넷 냉동창고에서 강문일 국립수의과학검역원장 등과 검역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광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새 수입위생조건의 고시를 강행키로 한 데 대한 반발 여론이 거세다. 고시 강행은 국민 여론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법적 절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우선 고시 절차에서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추가협상에 따라 고시 내용이 변경된 만큼 이에 대한 국내 의견 수렴 기간이 필요한데, 정부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 5월29일 미국산 쇠고기 새 수입위생조건의 관보게재(고시) 요청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촛불’ 여론에 밀리자 인쇄까지 마친 관보의 제본을 중단해 고시를 보류했다. 법적으로는 한 차례 고시 내용을 발표했지만, 25일 농식품부가 고시 의뢰를 한 내용은 고시 변경에 해당한다. 현행 행정절차법에 따르면 정부 부처가 고시 내용을 바꿀 때는 20~60일간 다시 의견수렴을 거쳐야 하는데, 정부는 추가협의 결과를 발표한 지 불과 나흘 만에 고시를 밀어붙였다. 또 통상 관련 고시를 변경하는 경우에는 상대국 대표가 서명으로 합의한 문서를 첨부해야 한다는 법 규정도 정부 스스로 위반했다.

 

정부가 고시 강행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은 쇠고기 추가협상마저 무리하게 진행한 탓이다. 미국과 추가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에 합의해준 핵심은 바로 ‘고시를 확정한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이 잠정적 품질체계평가(QSA) 운영이나 30개월 미만 머리뼈 등의 당분간 수입금지 등을 내주는 대신 고시는 확정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고, 이에 양국 대표가 합의했다”고 전했다. 서명이 담긴 공식 합의문서를 내놓지도 않고 고시를 먼저 강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나라당도 애초 ‘충분한 의견수렴’을 내세우며 고시 연기를 요청했지만 정부가 거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당에선 애초 고시를 30일에 하자고 했지만, 정부는 ‘미국 쪽에서 지난번 고시 연기에 불신이 있다. 그래서 미국이 합의문도 고시가 확정되면 주겠다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며 “애초 정부는 23일에 고시를 하려고 했지만 그나마 당의 만류로 조금 연기된 것”이라고 말했다.

 

쇠고기 고시 절차의 여러 문제점은 정부 스스로 초래했다. 국민 건강권이나 검역주권보다는 미국과의 관계를 더 중시하다 보니, 미국 쪽 주장대로 재협상은 안 된다고 미리 선을 그어 놓으면서 얽혀 버린 것이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개인간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국가간 관계에서도 합의사항 준수가 중요하다”며 고시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총리실 관계자도 “미국과의 합의사항 이행이 지연되면서 미국 안에서도 한국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있고, 특히 우리 경제가 입는 타격도 만만치 않다”며 “정부로서는 고시 게재에 앞선 원산지 표시제 등 후속대책도 이미 발표한 만큼 합의사항 이행을 더 미룰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미국의 무역보복 가능성을 들었다. 그러나 국제법적으로 재협상이 불가능한 협정은 없으며, 실제로 미-페루 자유무역협정(FTA)의 경우는 의회 비준이 끝났는데도 미국 정부가 재협상을 했다.

 

고시 강행의 배경에는 정부와 여당의 정치적 판단도 깔려 있다. 연기로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것이 많다고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걸림돌인 ‘촛불 민심’이 다소 사그라드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면서, 촛불시위 등에 강경대응으로 돌아선 것에서도 정부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국가 정체성에 도전하는 시위나 불법 폭력시위는 엄격히 구분해 대처해야 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난 24일 발언에서도, 쇠고기 정국을 빨리 벗어나려는 정부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김진철 최익림 성연철 기자 nowher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