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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준 같은 연예인, 정선희 같은 연예인

강산21 2008. 6. 22. 16:59

배용준 같은 연예인, 정선희 같은 연예인

기사입력 2008-06-22 09:00

배용준 같은 연예인, 정선희 같은 연예인

【서울=뉴시스】

◇이문원의 문화비평

요즈음 한류스타 배용준을 보면 경이로움을 넘어서 두렵다는 느낌까지 든다. 그 철저한 이미지 관리 탓이다. 많지 않은 언론 인터뷰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완벽하게 겸손하고 친절하고 섬세하며 진중하다. 인간적으로 흠잡을 데가 전혀 없다. ‘실수’가 없다.

그러나 배용준이라고 늘 그렇게 완벽했던 건 아니다. 실수랄 것까진 없지만 다소 파격적이고 아슬아슬한 모습도 종종 보여줬다. ‘겨울연가’ 빅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빅뱅 이전인 2003년, 영화월간지 ‘프리미어’와 가진 인터뷰는 그의 ‘아직 교정되지 않은 모습’을 잘 보여준다.

“영화출연료가 커진다면 CF 안 하겠죠. 돈 있으면 안 하죠” “이 새낀 날 좋아하는 거 같아요” “제가 유혹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왜 유혹을 못 하겠어요” 등,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과격발언들이 넘실댄다. 그 이전 인터뷰까지도 모두 감안해보면, 사실 배용준은 꽤나 시원시원하고 남성적인 인물형이다.

그런 그가 지금처럼 부자연스러운 ‘완벽남’으로 바뀐 까닭은 뭘까. 거대해진 위상만큼 풍모나 태도도 이를 따라야 ‘뒤탈’이 없다는 점도 물론 있다. 본래 위상 확대는 그만큼 확대된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이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보여줘야 할 ‘대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배용준의 새 이미지는 철저히 일본인의 취향에 맞춘 것이다. 사실 한국 대중은 기존 배용준 이미지, 즉 파격도 있고 자신감도 있는 남성적 이미지를 더 선호한다. 그러나 자신을 ‘팔 곳’이 일본이므로 일본 대중용 이미지를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헛기침 한 번 하고도 “미안합니다”를 연발하는 지극한 예의는 누가 봐도 국내용은 아니다.

국내에선 그 정도까지 가면 예의가 아니라 과민반응으로 여긴다. 나아가 “성실하게 살고, 주위 사람에게 폐 끼치지 말라 부모에게 교육받았다”고 술회하는 부분은 완벽하게 일본식 가정교육 덕목과 일치한다. 한국 가정교육에서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는 주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배용준은 이토록 철저한 연예인이다. 시장과 자기 커리어를 일치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시장과 자기 실체를 일치시켰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연예인과 그에 준하는 직종군은 자신의 일 자체가 곧 자신을 바라보는 대중 정서에 기댄다. 대중이 자신을 어찌 보건 간에 나는 내 할 일만 잘 하면 된다 여기는 건, 연예인이라는 직종 속성을 아예 이해 못한 판단이다. 연예인은 대중 속에서 살아가고 대중에 의해 존재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존재가치가 콘텐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배용준의 경우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 그처럼 연예인 속성을 잘 이해하고 철저히 적응해낸 사례는 사실상 전무하다. 대부분 ‘어느 정도’까지만 맞추거나, 서인영이나 솔비처럼 ‘틈새시장’을 과격하게 치고 들어간다. 파격도 계산의 범주에 든다면 이 또한 적응이라 볼 수도 있다. 반면, 이 같은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적응하지 못한 예로는 정선희가 대표적이다. 배용준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정선희는 지난달 22일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미국 쇠고기 반대 촛불 집회에 대해 미묘한 발언을 남겼다. 평소 같으면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처럼 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선 지적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모두가 예민한 시점이다.

여파는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이후 그녀의 조치가 사실상 미미해서 그랬다. 공식사과도 늦었고, 사과까지 이르는 동안의 그녀 태도가 이중으로 도마에 올랐다.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정선희는 자신이 진행하는 MBC 프로그램 3곳에서 자진 하차하기에 이르렀다.

단적으로 말해, 정선희는 연예인(또는 방송인)이라는 틀에 넣어서 자신을 생각해보는 과정이 미진했다. 연예인의 자기주장이란, 철저하게 계산되어 진행된 것이 아니라면 아예 하질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사례도 가려가며 해야 한다. 대중이 한 몸으로 움직이는 시점에 대치되는-혹은 대치되는 것으로 ‘보여질’ 소지가 있는-자기 발언을 한다는 건, 민주주의로선 승리이지만 연예인으로선 자살행위이며 직업의 역할 개념에 있어 빵점이다.

언급했듯, 연예인은 자기 할 일 잘 한다고 능사가 아니며, 옳은 말, 당연한 말 하는 것은 연예인이 아니라 언론인이다. 연예인은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대중도 정선희에게서 그런 역할만을 기대했기에 반발이 컸다. 이문열의 역할이 따로 있고 손석희의 역할이 따로 있듯이, 정선희 역할도 따로 있었다. 그게 싫다면 다른 직업 찾아봐야 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대중과의 채널링만을 목표로 살아간다는 건 누가 봐도 고통이다. 하물며 배용준마저도 2006년 6월 ‘GQ’ 인터뷰에서 이런 고충을 피력한 바 있다. 인터뷰에서 배용준은 ‘옛날 우상들은 배짱이나 본능에 의해 움직였지만 당신은 존재감을 제한하며 산다. 그렇게 산다는 건 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평생 살라면 못살 것 같다. 어떤 때는 고통스럽다. (중략) 내가 그어놓은 선에서, 아니면 남들이 그어놓은 선에서 튀어나가지 못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병원을 찾아가보니, 계속 긴장상태여서 신경 자체가 수축이 안 되고 늘어나 있더라는 일화까지 소개하고 있다. 연예인이 힘든 직업인 까닭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다. 과밀한 스케줄, 인기에 대한 부담감보다도 ‘자기 실체를 제어하고 사는 삶’ 자체가 가장 큰 고통인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미국 같은 서구 대중문화 선진국 사례다. 서구에선 연예·방송인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 현상에 대해 충분히 자기 주장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데, 왜 한국만 연예인을 틀에 가둬놓고 고문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한국이 보다 더 연예인 사생활에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는 건 사실이다. 공인 개념이 들어서서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 하루짜리 단발이슈로 끝나고 잊혀진다. 국가적·민족적 감정선을 건드리는 특정 이슈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한국은 그런 특정 이슈가 반미감정, 반일감정, 병역문제, 계급갈등 조장 등 다소 다양할 뿐이다. 서구는 그런 특정 이슈가 많지는 않지만, 일단 한 번 건드리면 한국과 같은 효과를 낸다. 커리어를 망친다.

올 초 영화 ‘장밋빛 인생’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랑스 여배우 마리온 코티야르가 좋은 예다. 예기치 못한 수상과 함께 코티야르는 일약 할리우드의 새로운 거물급 여배우로 다가섰으나, 이런 인플레이션은 불과 일주일 천하로 끝났다. 코티야르가 9·11 테러에 대해 ‘미국의 자작극’이라 주장한 예전 인터뷰가 다시금 부상하면서부터다.

전에 없는 국가적 비극으로 미국인들에게 상처를 준 9·11 이슈가 이런 식으로 터지자, 대중은 바로 코티야르에게서 등을 돌렸다. 미국 대중은 그녀를 ‘프랑스의 요정’에서 ‘기분 나쁜 프랑스인’으로 폄하하기 시작했고, 그녀에게 쏟아지던 수많은 출연제의는 상당부분 취소됐다. 결국 코티야르는 ‘이름 좀 알려진 외국배우’ 신분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세계 어딜 가나 연예인의 기본 조건은 변하질 않는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대중에 대한 연예인의 짝사랑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에 잘 보이기 위해 대중의 모든 면면을 파악해 맞춰나가야 한다. 그로 인해 위상이 확대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언뜻 ‘연예인은 결국 광대’라는 비하적 입장이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대중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는 광대이기에 대중은 그들에게 존경보다도 더 큰 사랑을 주는 것이다.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