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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다른 말, 속 모르는 말, 속 불지르는 말

강산21 2008. 6. 7. 10:50

속 다른 말, 속 모르는 말, 속 불지르는 말

기사입력 2008-06-07 02:43 

‘광장’으로 나온 ‘아고라’ 72시간 릴레이 촛불시위 이틀째인 6일 시민들이 각종 깃발과 구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서울시청 앞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서성일기자

ㆍ李대통령·여권인사들 입만 열면 촛불 더 타올라

◆이중적인 李

‘촛불’로 상징되는 현 시국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은 ‘이중적’이다. 말과 행동이 겉돌고 있다. 이 대통령이 연일 “우리가 국민의 눈높이를 잘 몰랐다”(3일 국무회의)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재협상에 나서지 않거나 인적 쇄신에 소극적인 태도가 증거다. 실은 쇠고기 협상이 잘못됐다고 보지 않지만, 반대 여론이 많으니 마지못해 따라가는 양태인 것이다. 당초 이 대통령이 쇠고기 협상이 잘된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광우병 발생시 수입 중단,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출입 자율규제로 마지못해 물러서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난다.

이 대통령은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정부는 더 낮은 자세로 귀를 열고 국민의 소리를 듣겠다”면서 “국민 여러분과 제가 한마음이 되어 선진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자”고 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3일에는 “지난 취임 100일을 돌아보면 자성해야 할 점이 많다”고 말했다.

정작 쇠고기 논란이나 촛불집회에 대한 대통령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이 대통령은 양초 구입비 출처를 조사하라고 하는가 하면 지난달 22일 대국민담화문에서 “소위 ‘광우병 괴담’이 확산되는 데 대해 솔직히 당혹스러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5일 고위 공직자들과의 대화에서 “(촛불집회가 벌어지는 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이유를 이해,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한 셈이다.

실제 이 대통령은 이들 사안을 단순히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해석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나서고 있고, 여기에 고유가 등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는 인식이다. 시민들 분노의 한복판에는 국민을 무시하고 독주하는 이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행태와 리더십이 놓여 있다는 점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촛불집회 초기인 지난달 8일 “쇠고기 협상이 타결됐을 때 정부는 사실 한우농가대책을 놓고 논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광우병 얘기로 가더라. (광우병 공격하는 사람들은)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 아니냐”고 말했다. 바탕에는 한·미 FTA가 “우리 경제의 새로운 활로이자 선진국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역사의 분기점”(대국민담화문)이라는 믿음과 함께 ‘경제만 잘되면 다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 대통령은 ‘질 좋고 값싼 쇠고기’를 제공하려는 진정성을 몰라주는 국민을 탓하기보다 왜 촛불이 등장했는지를 짚어봐야 한다”며 “이 대통령이 대대적인 인적 교체와 국정 쇄신을 하더라도 성장 지상주의나 ‘나를 무조건 따르라’는 식으로는 제2의 쇠고기 파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영기자 >

◆안일한 여권

‘말’이 화를 키웠다. ‘쇠고기 정국’ 내내 당·정·청 인사들의 ‘말’은 쇠고기 민심에 대한 ‘몰이해’와 ‘안일함’으로 요약된다. 이는 성난 민심에 불을 지르며 촛불집회의 심지를 돋우게 만들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상황”이란 뒤늦은 자탄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실언’의 여부가 아니라, ‘광우병 우려=정서’라는 인식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광우병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여권 인사들에겐 여전히 ‘정서’나 ‘감정’상의 문제일 뿐이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지난 5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미국 대사를 만나 “한국은 고유한 농경국가로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정서가 쇠고기에 스며 있다”면서 ‘이해’를 구했다.

앞서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 부의장은 지난 3일 촛불집회 참가 시민들을 “실직하고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과 서민, 어려운 중소기업 경영자”들로 설명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전여옥 의원도 같은 날 “지금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권위 있는 단체의 말보다는 일부 주부협회에서 나오는 감성적인 이야기를 더 믿는다”고 했다가 네티즌들의 비난 대상이 됐다. 지난달 8일엔 홈피에 올린 글에서 촛불문화제와 관련, “근거 없는 소문과 미신, 조작된 정보가 휩쓰는 비과학적 세상을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라고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가벼운 말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그 이면에 깔린 인식이다. 광우병 우려를 ‘정서’의 문제로 보는 바탕엔 쇠고기 정국의 근본 문제를 치유하기보다는 ‘넘어가고 보자’는 안일함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쇠고기 파문 초기 정부 당국자들의 ‘실언’도 따지고 보면 같은 연장선이다. 민동석 농림수산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은 지난 4월22일 “광우병 특정위험물질만 제거하면 99.9% 안전하다. 마치 독을 제거하고 복을 우리가 아무런 걱정 없이 먹는 것하고 같은 이치”라고 했다가 ‘민복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정운천 농식품부 장관은 ‘광우병 우려’를 “국내 농축산업 보호나 정치적인 해석 때문에 부풀려진 것이다. 나도 미국에 가면 쇠고기를 자주 먹는다” “부안에 방폐장이 들어설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선동됐기 때문” 등으로 폄훼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은 “30개월이 안 된 소만 먹는 줄은 몰랐다. 소도 엄연한 생명체인데 잔인하다”는 민심과 동떨어진 발언을 하기도 했다.

국민대 목진휴 교수는 “국민들은 쇠고기 문제를 정책으로 보는데, 당국자들은 상품의 문제로 본다”면서 “정말 인식의 문제가 있다. 꼭 쇠고기 문제가 아니라도 앞으로 다른 부분에서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광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