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정치, 그 따위 없는 곳에 살고 싶다

강산21 2008. 3. 24. 17:51
 정치, 그 따위 없는 곳에 살고 싶다
/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누군지가 '정(政)'이 뭐냐고 묻자, 공자가 답했다. "정(正), 곧 바른 것, 정당한 것을 취하는 것이니라." 政은 바를 '正'에 움켜잡을 복자가 달라붙어 있으니 공자의 해석은 일단은 전적으로 옳은 것 같아 보일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공자 말대로라면 오죽 좋을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다들 우리 현실이 전혀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게 될 것 같다. 부정을 택하여서는 거기 악착같이 달라붙곤 하는 비중이 오늘날의 우리 정치 현실에서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데 공자의 해석은 지나치게 고지식하다. 政이란 글자의 겉모양만 보고 내린 해석이기 때문이다. 워낙 그 엄밀한 어원을 캐면, 正과 征, 政, 이들 세 글자는 모두 꼴불견의 개망나니들이다. 발음이 모두 같은 데다 뜻도 셋이 모두 그게 그것이다.

正을 '바를 정'이라고 미화한 것은 후대의 일이다. 그 으뜸의 의미는 남을 치고 부수고 뺏고 하는 폭력을 의미했었다. 그러기로는 정복의 征이 다를 것 없다. 그리고 정치의 政도 마찬가지다. 셋 다 다같이 깡패고 폭력이고 부당한 무력이다. 남의 고을이나 집단을 쳐서는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해서는 뜯어낼 것, 깡그리 뜯어내기로는 이들 셋이 한 패거리다.

하긴 그렇다. 인류 역사에서 상고대부터 중세기까지 한 집단 또는 한 국가의 정사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였던 것이 침략이고 전쟁이고 했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政자 풀이가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 또는 일부 집단 전체의 규모에 걸친 정치로서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 현실에서 政은 공자의 말을 따르고 있을까? 아니면 征과 통하고 부당한 폭력이나 싸움질과 통하고 있을까? 궁금해질 것 같다. 아니 판단을 망설이고 뭔가를 궁금해하고 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이건 장담해도 좋다.

워낙 正은 치고받고 하기 그 자체 또는 그 수단이나 방편을 의미했다. 거기에 박살내고 휘갈기고 한다는 뜻의 복 자가 야합해서는 政자가 생겨 난 것이다. 우리의 오늘날의 政은 이 본시 의미를 알뜰하게 살뜰하게 지켜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폴리티션'과 '스테이츠맨', 이 두 낱말을 구별한다. 어느 쪽이나 우리말로는 정치가라고 번역이 될 텐데도 저들은 그 둘을 다르게 쓴다. '스테이츠맨'은 공자의 말대로, 옳을 正을 지켜내려는 정치가들이다. 이에 비해서 '폴리티션'은 政의 흉측한 어원 풀이가 그대로 적용된 정치가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의 이른바 '대선(大選)'은 거의 대부분이 서로 헐뜯기고 서로 피 보기다. 심지어 상대방 밑구멍을 훑어 내보이려고 덤비기도 하는데 그때 본인의 밑구멍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날 건지 어떤지 국민들은 궁금해지곤 한다. 그런가 하면 소위 통치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곤 하는, 전 국가 규모에 걸친 정치는 무지와 독선과 횡포로 넘쳐 있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크다. 그리고 그들끼리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흉물스럽게 뭉치다 보니 부패와 부정으로 권력 상층이 부분적으로 문드러져 가고 있다. 어느 면으로 보든 간에 공자의 政자 풀이가 적용될 여지를 찾아내기는 쉬울 것 같지 않다.

20세기의 중간쯤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산문 작가인 토마스 만은 그의 '비(非) 정치인의 성찰'이란 에세이집에서 말했다. '현대인에게 정치는 숙명이고 운명이다.' 그는 현대인이 유감스럽게도 피치 못하게 '호모 폴리티쿠스', 곧 '정치인'이 아닐 수 없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더러운 운명, 흉측한 숙명을 타고 난 꼴이 된다. 적어도 우리 한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딘가 정치라는 그 흉물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꿈을 이루고 싶다. 그 간절한 소망 이루고 살고 싶다. 한데도 그 망할 것 없는 세상은 없을 것이니, 이를 어찌한담? 소망의 간절함이 큰 만큼, 슬픔도 아픔도 크다.
/ 입력시간: 2007. 11.15. 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