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축구선수, 차범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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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6 (월) 12:05 | |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리그 우승
UEFA컵 2회 재패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세운 사람.
지금도 독일인들은 차붐 하면 알아줍니다. 차두리가 레스토랑이나 편의점 가서 계산하려고 하면 그냥 가라 이럴 정도입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는 더 그렇죠. 발락, 클로제 같은 선수들도 차붐을 안다고 합니다.
어떤 프랑스 시인은 차붐을 낳은 어머니와 그의 조국에게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시까지 썼다고 합니다.
차붐의 주요 활약상을 살펴보자.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Park''s Cup)
말레이지아 전 1:5로 뒤지던 상황에서 종료 5분 남겨놓고 4골의 소나기 골.
*79년 프랑크 푸르트 입단
- 8월 당시 세계 최고 리그로 불리던 분데스리가 데뷔
- 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뛰며 어씨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紙 선정 주간 베스트11. -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에서 헤딩으로 승리 결정 골. KICKER지 선정 이주일의 골.
-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에서 그라보스키 어씨스트로 선취골.
-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이 왼쪽 포스트 맞고 골로 연결됨. 선취골로 세경기 연속 골 기록함.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씨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 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푸르트 3:1로 승리.
일간스포츠 톱기사 "차범근 두골! 오쿠데라 누르다"
이때 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시청률 최고.
*12월 UEFA 컵 출전.
-첫번째 경기 레알 마드리드를 맞아 차, 선취골을 넣었으나 1:1 무승부
-두번째 경기 AC밀란 전.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강슛. 포스트 맞고 튀어나왔으나, 골대 5초이상 흔들림. 특종 기사실림. 3:2로 프랑크 푸르트 승리.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로타 마테우스(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마테우스! 차붐을 막아라> 톱기사. 경기 마테우스의 완승. 차붐 속수무책. 2:3 패.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이번엔 마테우스 속수 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씨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경기 후 신문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이다."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
-81시즌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부상이후 슬럼프. 이때도 역시 한국언론 차범근 씹기 발동.
-KICKER지 이일로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기사.
-곧 슬럼프 회복.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
-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시즌 분데스리가 MVP !
-득점 4위.
-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 5만 관중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신문 톱기사 <지구 최고의 선수 ''차붐''>
-KICKER지 <차붐, 팀 창단 첫 UEFA 우승 두번이나 이끌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영웅이자 분데스리가의 최고스타>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출장 최다골 기록 (아쉽게도 이기록은 최근몇년전에깨짐)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
당시 독일에서의 차범근은 최고의 용병으로 꼽혔습니다. 보루시아MG와의 시합 당시 20살임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의 홈이라고 불렸던 마테우스가 차범근의 전담마크를 담당합니다.
시합날 차범근은 날아다녔고 마테우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시합후 마테우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말합니다.
"나는아직 어리다, 그러나 차범근은 세계최고의 공격수다" 이렇게 자신의 패배인정과, 패배를 정당화시킵니다.
또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진출한 선수가 있죠 일본의 오데쿠라, 그 선수 또한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차범근과 맞붙을 기회가 있었구요.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것으로 집중받기도했으나 시합 당시 차범근은 역시나 날아다녔고, 오데쿠라는 헛발질 7번...
그리고 누구 인가가 말하기를, "현재 분데스리가에서 평범한 마크방법으로 차범근을 마크할수있는 수비수는 아무도 없다"라고 했었습니다. 그 정도로 굉장한 공격력을 가졌던거죠.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시절 팀의 주장이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시합이 끝나고, 차붐의 몸을 봐라, 이것은 2차대전에 참가한 병사의 몸과 다를 바 없다"
그 정도로 집중마크를 당했던 겁니다. 그의 체력 또한 어마어마했죠. 현재 우리나라 국대팀에 인간병기 차두리,
한강변을 아버지와 끝에서 끝까지 달리기를 하는데. 차범근은 저만치 앞에가 있고, 차두리는 못쫓아가고 뒤에서 헥헥-대고 있더군요.
차범근 나이 38에 19살의 독일국가대표선수보다 체력이 월등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가 얼마나 몸관리를 잘했는지를 알수가 있죠. 또 어떤 사람들은 차범근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못했다고 딴지를 거는데요. 그 당시의 UEFA컵은 지금보다 훨씬 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챔피언스리그가 각나라리그 1~3위가 진출을 하지만 그 당시에는 무조건 1위만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다 허접팀이 올라갈 수도 있었고, UEFA컵은 2위부터..몇?위까지 쭈루룩...진정 최강팀들과 자웅을 겨뤄야 했던거죠.
한 경기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붐'을 연호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프랑크푸르트 소속당시 레버쿠젠과의 시합당시 레버쿠젠의 겔스도프라는 선수가 뒤에서 찍어가지고 차붐을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자 차붐 광팬들 칼들고 레버쿠젠에 그 놈 죽이러 가는 일까지 생깁니다. 그리고 차붐이 레버쿠젠으로 옮기자 프랑크푸르트 팬들은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구요.
86월드컵 에대해서도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이 86월드컵때 차범근이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고 그렇게 차붐-차붐-해대더만 골도 못넣었다고 씹어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가 만났던 나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불가리아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영원한 세계축구강국들 아닙니까? 그리고 시합내내 전방에 나가 있는 차범근에게 공이 연결된 적은 5번을 넘지못했습니다. 미드필더에서 완전히 밀려버린거죠, 차범근 하나만 잘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예를들면 현재 세계 최고의 윙-라이언 긱스, 그 또한 웨일즈의 사람이라 웨일즈는 월드컵 구경도 못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한번 진출한 적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알아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차범근은 당시 발목부상중이었습니다. 수술을 해야할 상황이었는데, 월드컵 때문에 월드컵후로 미루고 발목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시합에 참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비수를 끌고 다니면서 공간을 만드는게 안보인다면 축구보지마십시오. 만약 차범근 활동 당시 지금처럼 당연지사 월드컵 본선을 진출하는거라면, 분명 한번은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을겁니다.
독일에 차범근 활동당시 칼하인츠 루메니게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선수는 유럽의 펠레라고 불렸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펠레와는 시대의 차이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펠레보다 조금 더 앞설거라고까지 평가받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시절 감독은 차범근이 칼하인츠 루메니게보다도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차범근, 호나우두, 피구같은 선수들과 비교해서 절대 뒤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차범근이 득점한 골수가 그들에 비해서 크게 많은게 아닌데요. 그 이유는 차범근은 전형적인 골게터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자기편 선수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공을 보냈습니다. 즉 자신의 득점보다 팀의 승리를 위한 플레이를 했다는거죠.
일본에 70년도에 가마모토 구니시게 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선수의 실력이 가히 엄청난 선수였습니다. 올림픽에서 혼자 7득점을 한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런데 자기들만 잘난줄아는 그 일본놈들이 그 가마모토를 아시아 최고라고 부르는 것은 주저합니다. 그건 바로 한국에 차범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차범근을 아시아의 호랑이 라고 부릅니다.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 차범근, 그는 한국사람입니다.
쿤트네처의 Great Player 열전, 차범근 편
세계 각지에서 차범근을 만날 때마다 그 시절에 왜 차범근과 인연이 없었을까? 하고 자책하곤 한다. 그 시절이라고 하면 내가 함부르크SV의 매니져를 하고 있었을 때이다. 새로운 스트라이커를 영입해 전력을 강화하려고 했을 시기는 함부르크가 분데스리가 챔피언 타이틀을 지키고, 유럽컵 아테네 시합에서 유벤투스를 꺾고 난 바로 뒤였다.
스트라이커 후보로 거론 된 인물은 프랑크푸르트의 차범근과 장래성이 있는 젊은 독일선수 두 명이었다. 박력있고 운동량 풍부한 샤트 슈나이더와 뛰어난 드리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가운데, 측면 어느쪽에서 든 훌륭한 패스와 센타링을 구사할 수 있는 볼프람 푸트케가 바로 이 두 젊은 독일선수들이었다.
나는 차범근을 택하고 싶었다. 차범근은 당시 분데스리가 공격수 중에서 어느 누구보다 강하고 우수한 선수였다. 그 때 분데스리가는 세계 최강의 리그였다. 그러나 마음 한 부분에서 또 다른 꼬득임이 있었다.
'너는 이미 유럽 챔피언 팀 매니져로서 반년이란 세월을 보냈잖아! 팀에는 국제 경험 풍부한 선수가 남아돌 정도로 많이 있고.....그러니 젊은 선수 둘을 택해라. 베테랑 선수들이 그 젊은 녀석들을 멋지게 키워 줄 것이다.'
그 후에, 그것이 큰 실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현대 축구에 적응할 수 없었던 두 젊은 선수에 의해서 그토록 강했던 팀이 비참하게 망가져 버리고만 것이다. 함부르크는 이 후 우승은 물론, 우승 다툼 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홀스트 후루베쉬와 랄스 바스돌프등의 공격진에 차범근을 끌어드려 페릭스 마가트와 만프레도 칼츠의 패스와 센타링을 받아 주었다면 함부르크는 3번째 리그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츠펠트와 에휀 베르크 콤비로 성공을 이룬 바이에른 뮌헨과 같은 황금기를 우리도 당시에 구가할 수 있었다고 지금도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매니져로서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로지 '장래성' 하나만 보고 차범근과 같은'안전패(安全牌)'를 버렸던 것이다.
차범근은 신뢰할 수 있는 선수의 표본이다. 차범근은 케빈 키건과 함께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모범적인 외국인 선수였다. 컨디션의 기복이 거의 없었고, 지방의 친선 시합과 같은 게임에서 조차 전력을 다해 플레이했다. 당시 아시아 출신 선수가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의 제 1선에서 활약 한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차범근은 유럽에서 활약한 최초의 아시아인이었다. 차범근 정도라면 세계의 어느 클럽, 어느 공격진에 들어 가더라도 주전 멤버로 활약했을 것이다. 차범근은 골을 확실하게 터뜨렸을 뿐아니라 동료들에게 송곳과 같은 어시스트를 제공했다. 스트라이커로서 차범근은 흠잡을 때가 전혀 없었다.
현재까지 아시아에서 차범근 정도의 플레이어는 배출되지 않고 있다. 사실, 당시에 일본에는 가마모토 구시니게라는 훌륭한 센타포오드가 있었다. 데트마르 크라머가 놀랐을 정도로 재능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을 떠나 전혀 다른 문화권의 나라에서 프로 축구선수로 활약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현재 나카다 히데토시가 유럽에서 어느 정도의 레벨까지 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과연 나카다가 10년간 유럽 무대에서 대활약한 차범근과 같은 수준의 실적을 올릴 수 있을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서 말하면, 차범근은 세계 축구 전문가들로부터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선정됐다.
차범근은 플레이 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동료들과 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아시아인인 차범근은 후에 브라질에서 독일로 건너 온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전파한 기독교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기독교 선교사로서도 활동한 차범근에게 영향을 받은 선수들, 브라질의 죠르지뇨, 파울로 세르지오,
또한 레버쿠젠 팀동료였던 제 호베르토 루치오라고 하는 선수등은 스타디움 안에서도 늘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 1980년의 일이었다. 레버쿠젠의 DF 유르겐 겔스돌프는 그 해 UEFA컵 챔피언에 오른 프랑크푸르트의 스트라이커 차범근에게 경기 도중, 등 뒤에서 심한 태클을 가해 큰 부상을 입혔다. 겔스돌프의 파울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테레비를 통해 그 장면을 목격한 독일 축구팬들도 경악했다.
차범근 주치의는「제 2 요추 골횡 돌기부 골절」이라고 진단 내렸다. 차범근이 병원에서 선수 생활의 사활을 걸고 치료에 전념하고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는 매스컴을 통해 이와 같은 내용의 문서를 발표했다.「차범근은 <증오가 아닌 용서> 라고 하는 기독교적 신념에 입각해 겔스돌프에 대한 형사 고발을 거부합니다.」라고.
이후 3 년 뒤,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그 첫날 차범근은 겔스돌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 날 부터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무렵 있었던 인터뷰를 나는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도를 넘어선 강한 태클과 지져분한 플레이로 덤벼드는 상대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대처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차범근은 이렇게 답했다.
「그러한 상대에게는 '이것은 룰 위반이고 파울이다. 또한 품격없는 행위다' 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수들은 무시합니다.」라고. 품격있는 차범근에게 있어서는 '보복 행위' 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범근 처럼 스피드가 있으면 페널티 에이리어 안에서 그 민첩함을 살려 페널티킥을 자주 얻어낼 수 있지 않았겠느냐? 라는 질문에 언제나 웃으면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나는 그런 행동은 안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로서의 자세가 아닙니다.」라고.
차범근이 레버쿠젠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독일의 어느 기자가 작별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의 타이틀은 다음과 같다.
「수라장(修羅場)을 맨발로 뛴 10년. 그 수라장(修羅場)이라고 하는 곳은 바로 분데스리가의 페널티 에이리어 안이었다.」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축구선수.
진정 당신을 보면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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