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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MBC 기자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지난해 12월 말이다. 당시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2시간 전 자신의 홈페이지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이른바 ‘구찌핸드백
파문’의 진원지 역할을 했던 이 글 속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번 출장은 자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수반하는
일이다… 나의 출장계획이 누군가에게 알려질 경우, 나는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안다. 그리고 각오한다.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자본의 심장에 도덕성의 창을 꽂는 일. 이를 위해 기자는 어쩌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시대의 좌판 위로 주사위는
던져졌고, 활은 시위를 떠났다.”
그가 떠나있는 사이, 한국 사회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명품가방을 둘러싼 파문이 불거진 것이다.
미디어비평을 담당하는 기자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분노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 기자는 논란이 일고 있는 와중에도
귀국을 미루며 취재에 몰입했다. 이 때문에 그가 밝히려고 했던 바가 무엇인가 하는 목소리가 일각에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상호
X파일’이 본격적으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약 5개월여의 시간이 흐른 지난 6월초. 이인용 전 MBC 부국장의 삼성행을 비판한
이 기자의 글에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이 “이제 MBC와 이상호는 재벌기업과 언론기관의 정관계 로비 및 불법 뇌물과 정치자금 제공
비리를 세상에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양 위원은 당시 데일리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이 글에서 “도대체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뇌물과 정치자금은 누가 받았고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이 기자·언론사로서의 도리”라고
강조하며 관련 보도를 촉구했다.
문제는 내부의 벽이었다. 같은 달 16일 소집된 부장급 이상 MBC 보도국 간부회의에서 ‘이상호
X파일’을 보도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당시 이들은 법률자문을 받은 결과, 녹취테이프를 공개할 경우 통신비밀보호법에 저촉되며,
민사소송까지 갈 경우 패소가 유력하다는 점을 들어 보도에 소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자 MBC노조와 기자회가 반발했다.
MBC노조는 간부회의 내용이 공개된 후 신용진 보도국장에게 보도불가 결정에 대한 비공식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기자회 역시 운영회의를 연 뒤, 신
국장을 찾아가 구도로 항의의 입장을 전달했다.
이 같은 논란이 계속되면서 MBC 내부에선 “특별취재팀을 구성해서 취재해온 내용을
방송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반응에서부터 “보도국 간부들이 여러 가지 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내린 판단”이라는 반응까지 다양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특히, 외부에선 “MBC가 ‘이상호 X파일’에 등장한 재벌기업과 중앙일간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겠느냐” 는
의혹까지 터져 나오면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더 나아가 ‘과연 MBC가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낸 집단인지 의심이 갈
정도’라는 목소리까지 나오면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후발주자들, 막판 뒤집기에
본격 시동
이런 가운데 그동안 조금씩 새어나온 정보를 접한 다른 중앙언론사들이 관련 사실에 대한 취재에
착수하며 물밑 보도경쟁에 시동을 걸었다.
매체비평 전문지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한겨레신문은 국장단 회의를 열어 ‘이상호 X파일’을
구할 수 있는지 논의했으며, 만일 녹취테이프나 녹취록을 입수할 경우 내용 전체를 보도한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관련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는지
MBC에 직접 타진하기까지 했다.
조선일보의 경우엔 우회로를 선택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에서 해고된 직원들을 대상으로
직접 취재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를 통해 MBC가 갖고 있는 녹취테이프가 지난 97년 대선 직전 안기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고,
발빠르게 기사작성까지 마쳤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가장 먼저 치고 나온 것은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는 지난 20일자에서 ‘이상호
X파일’의 출처와 내용, 그리고 이를 둘러싼 MBC 내부의 논란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했다. 그동안 물밑에서
취재경쟁을 벌여왔던 라이벌들을 직접적으로 자극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출고를 마친 기사의 게재시점만 엿보고 있던
조선일보가 바로 다음날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조선은 ‘안기부, YS정부 때 비밀조직 운영 政·財·言 인사들 대화
不法도청’이란 제목의 1면 머릿기사를 통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지난 93년부터 98년 2월까지 비밀도청팀을
가동, 정계·재계·언론계 인사들에 대해 ‘출장도청’을 해왔다고 폭로했다.
신문은 또 MBC가 갖고 있는 ‘이상호 X파일’이
안기부의 현장도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확인한 후, 97년 대선과 관련해 모 중앙일간지 고위인사와 모 재벌그룹 고위층 간에 오간 대화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의 보도가 나가자 사회 전체, 특히 언론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상호 X파일’의
뚜껑을 다 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 여파는 MBC에 크게 미쳤다. 이미 수개월 전 관련
자료를 입수해놓고도 보도에 나서지 않았던 소극적인 행태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것이다.
MBC는 결국 이날
오전 보도국 간부회의를 통해 관련 보도를 내보내기로 입장을 바꿨다. 그리고 이상호 기자를 포함, 정치·경제·사회1·사회2부 등에서 차출한 총
8명의 기자로 특별취재팀을 구성해 본격적인 보도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굳게 잠겨있던 비밀(?)의 문이 열리는 데엔 역시 진통이
필요했다.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서울남부지법에 MBC를 상대로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방송 1시간여를 앞두고 내린 판결에서 “불법 테이프이므로 원본 그대로 보도해선 안 되고 실명을 사용해도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아 MBC에 길을
터줬다.
그러나 본 게임에 앞서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던 탓일까. MBC의 보도는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루 종일 온
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그 내용 그대로가 보도에 담겨있었을 뿐, 안기부의 불법도청 의혹을 고발한 조선일보의 보도나 이날의 급박했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한 각종 인터넷매체의 보도를 능가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한 가운데 착실히 준비를 해왔던 KBS가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결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MBC가 미처 뉴스에 담지 못했던 녹취록의 내용까지 공개하며 시청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던 것이다. 이 때문에 MBC엔 비난이, KBS엔 찬사가 쏟아지는 상황마저 연출되고 있다.
‘MBC 후속 보도, 어디까지 갈 것인가’ 초미의 관심
이제 관심은 ‘이상호
X파일’을 손에 쥐고 있는 MBC가 어떤 수위로 후속 보도에 나설 지에 쏠리고 있다. MBC는 이미 관련 사안에 대해 ‘방송불가’라는 딱지를
붙인 전력을 갖고 있다. 또한 21일에 내보낸 미적지근한 보도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기도 하다. 만일 같은 실수가 다시 한 번 되풀이
된다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게 분명하다.
추락한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선지 MBC는 22일 밤 ‘뉴스데스크’에서 총 20꼭지를
할애해 관련 보도에 나선다고 한다. 21일 나온 법원의 결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안기부가 불법으로 녹취한 테이프의 전모를 밝히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처음부터 X파일의 실체를 추적했던 이상호 기자가 직접 카메라 앞에 설 예정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날
보도를 위해 취재 기자를 20명으로 증원한 점, 보도내용에 대한 삼성측의 법적 대응에 대비해 변호사의 자문 아래 리포트를 구성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여기에 더해 KBS가 함께 이끌고 있는 보도경쟁이 관련 꼭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도 주목할 만한 대목 중 하나다.
반면, 삼성의 경우 다소 수세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지난 21일 법원에 기습적으로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내 급한 불은 껐지만,
이미 전 사회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이상호 X파일’에 대한 보도를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일단 관망 자세를 유지하면서 ‘사안별 대응’의 보폭을
취하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삼성은 ‘이상호 X파일’의 주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일제히 공개되자 “매체별 보도의 위법성을 일일이
검토한 뒤 법적 대응을 할 방침”이라고 밝혀 대규모 소송을 예고하고 있다. 더 나아가 “도청 내용보도의 위법성은 법원에서도 인정한 만큼 소모적인
취재경쟁으로 확산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언론에 은근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한국 사회를 뒤흔들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이상호 기자의 표현대로 자본의 심장에 도덕성의 창을 꽂을 수 있을지, 아니면
언론의 굴복으로 완벽한 삼성공화국이 구축될 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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