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열린우리당 당의장 선거 소회(김정란)

강산21 2005. 4. 3. 18:27

열린우리당 당의장 선거 소회

김정란 (상지대 교수) 2005-04-03 15:06

요 몇 해, 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온다.

농부는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들여다본다. 그의 몸은 이미 알고 있다. 봄이 진작에 와 있다는 것.

그런데, 참, 왜 이렇게 봄은 분명한 징후를 늦게 드러내는 것일까. 그는 진작에 농구들을 다 손보아 두었다.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봄이 와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더욱 초조하다. 비만 한 차례 내려주면 될텐데....

농부는 아직 파삭한 땅 위에 무릎을 꿇고 가만가만 흙을 만져본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바라본다. 작은 풀들이 벌써 수줍게 여기저기 솟아나와 있다. 풀들은 농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이 옳아요. 그러니 초조해 하지 말아요. 보세요. 우리가 벌써 봄을 구현하고 있잖아요.

소란스러웠던 열린우리당 당의장 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개혁진영의 상당한 약진으로 드러났다. 무슨 수를 쓰든 움켜쥔 당권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이미 확보하고 있는 2007년 대선에서의 유리한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변화의 물꼬를 차단하려고 가지고 있는 카드란 카드는 다 보여주면서 완전히 벌거벗고 뛴 구당권파는 그 노골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혁세력의 대표인 유시민과 재야파의 맏형인 장영달의 진입을 막지 못했다. 유시민에게 올인한 네티즌들이 집중포화를 뚫고 유시민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혹자는 초반에 문희상 의원의 턱 밑까지 치고 올라갔던 유시민이 간신히 턱걸이로 중앙상임위원으로 선발되었다는 것, 그리고 김두관 전장관의 석패를 이유로 들어 개혁진영의 패배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처음부터 개혁진영이 원하는 완전한 승리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복기해 보면, 힘의 분포 자체가 처음부터 게임이 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럴듯한 <개혁>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386들까지 결국 구당권파 뒤에 서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유시민을 죽어도 울타리 안에 들여놓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배제투표”라는 지극히 비민주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떨구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유시민 죽이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싱겁게 집안잔치로 끝낼 수 있었을, 추악한 모양을 보여주지 않고도 <개혁>의 가면을 쓰고 자신들의 권력을 우아하게 다시 확보할 수 있었을 이 강자들은 허겁지겁 가면을 벗었다. 대단한 광경이었다. 관객들은 입을 떡 벌리고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벌어진 입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저들이... 수많은 민주화 투쟁 학우들의 피의 값을 챙겨 대표성을 획득한 저들이 어떻게 저런 짓거리를....

그뿐인가, 구당권파는 연청이라는 기왕의 막강한 조직과 국참연이라는 노사모 정신을 권력욕과 바꿔치기 한 세력까지 끌어들여야 했다. 거기에 지역감정이라는 낡은 정치세력의 구식 무기까지 동원했다. 가지고 있는 화력이란 화력은 몽땅 쏟아부은 것이다. 그 지독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일병과 장영달 병장은 살아남았다.

안타깝게도 김두관 일병이 유탄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살아돌아올 것이다. 그는 명분을 잃지 않았으며, 경선이 치러지는 동안 내내, 그 온화한 단호함으로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했으므로, 개혁 세력 안에서의 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2005년 열린우리당 당의장 선거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어쨌든 하나의 변곡점을 형성할 것이다. 앞으로 또다시 기간당원 제도를 후퇴시키려는 시도가 있을지도 모르고, 소위 <상생>이라는 핑계로 개혁법안들을 한나라당과 우물딱쭈물딱해서 후퇴시키려는 시도도 예상되고, 대거 열린우리당 내로 진입했다고 하는 연청 조직이 다시 당을 지역당으로 회귀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겉으로라도 개혁적인 체하는 흉내는 계속 내야 할 것이다.

유시민이 이제는 평당원의 자격이 아니라 중앙상임위원의 자격으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고, <조직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네티즌들이 서서히 당으로 흡수되어 들어가 오프에서 조직화될 것이고, 재야파와의 연대도 강고해질 것이므로 <도로민주당>으로의 회귀 시도는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다시 조직을 이용하여 종이당원들을 확보해서 물타기를 시도하겠지만, 그 시도는 점점더 힘들어질 것이다. 경선주자들은 경선 내내 <기간당원제는 훼손할 수 없는 원칙>이라고 온 국민 앞에서 확언했다. 물론 거짓말하는 것을 밥먹듯이 하는 정치인들이고 보면, 또 무슨 핑계를 대며 원칙을 훼손하려 들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내놓고 원칙 훼손을 주장할 수 없는 곳까지는 온 것이다.

유시민 의원이 당권을 장악하지 못한 이유를 놓고, 정동영 장관 계보와 선을 그은 한겨레 인터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럴까? 나는 유시민이 섣불리 그런 인터뷰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당내에서 실제로 당을 <도로민주당>으로 되돌리려는 가짜 개혁세력의 시도가 있다는 것을 진작에 간파했기 때문에(그것은 구 당권파의 기간당원제 폐기 시도로 일단 가시화되었다), 이번 당의장 선거에서 당권 장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대로 당권을 장악할 경우(그 가능성도 희박했지만), 당이 “개혁 세력”의 가면을 쓴 세력에 의해 안으로부터 썩어들어갈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본다. 당의장 선거처럼 세력의 분포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아니면, 그러한 실상을 국민을 상대로 보일 방법은 없다. 구태의연한 권력투쟁으로 보이기 십상일터이므로, 물 속에서의 싸움처럼 힘겨울 것이다.

누가 어떻게 당을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지, 누가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거짓 제스츄어만 쓸 뿐, 실제로는 유린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 전선 드러내기는 정치공학적으로는 서투른 판단이었을지 모르지만, 원칙적으로는 옳은 판단이었다고 본다. 결국 당내와 당외 모두에 경종을 울리는 효과가 있었다.

386들은 문희상 후보를 호위하면서 전격적으로 커밍아웃했다. 그 인터뷰가 있기 전부터 유시민을 물어뜯던 386들은 그 인터뷰가 나간 뒤,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공격을 개시했다. 점잖은 줄 알았던 임종석 의원까지 이빨을 드러냈다. 그가 유시민을 향해 “재야에 있는 게 좋겠다”라고 일갈하는 광경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온갖 과격한 방식으로 전두환 정권과 싸웠던 그가, 단지, 오로지 합리적이기만 할 뿐인 동료 정치인을 “급진주의자”로 몰아붙이며 마타를 내뱉어내는 광경이라니! 확보한 밥그릇을 움켜쥐고 으르렁대는 모양새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요컨대 임종석의 말은 이런 뜻이다. 기간당원-마당쇠들 끌어들이지 말아라, 정치는 우리 귀족들이 하는 것이다. 진짜 공화주의자인 너 때문에 가짜 공화주의자들인 우리가 피곤해 미치겠다, 너만 아니면 다음에는 우리가 안전하게 해먹을 차례인데 왜 기간당원-마당쇠들 끌어들여서 우리 나와바리를 위험하게 만드느냐, 정치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건데, 너 때문에 원칙을 고수해야 하게 생겼다, 그러니 마당쇠들에게로 꺼져라.

오, “X가지(죄송)”(오해 없으시기를. 나는 김영춘 의원의 말을 김영춘 의원에게 그대로 돌려드리는 것 뿐이다) 없는 386들이여, 구경 한 번 잘 했다. 그렇게 집단으로 달겨들어서 실컷 난도질해대고 나서 “술이나 한 잔 먹자”고? 정말 시쳇말로 “놀고 있다”.

이번 당의장 선거는 하나의 민주 정당의 당내 개혁이 명분을 표방한다고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확인시켜 주었다. 지나치게 절망할 것도, 또 자기 위안 삼아 지나친 낙관주의에 매몰될 이유도 없다.

사회의 합리화란 공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열린우리당의 진정한 변화를 원한다면, 변화를 원하는 지지자들 모두 당원이 되어 목소리를 내고 감시해야 한다는 것, 그것 외에는 종이당원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지금처럼 실제 지지자의 목소리를 대의원들이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왜곡된 정치적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 예외적인 몇 명의 정치인을 제외하면 어느 정치인도 진정으로 주권을 국민에게 돌려줄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다시 출발하면 된다.

우리는 아주 먼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 길은 성공적인 공화국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서구 사회가 걸어온 길에 비하면 그렇게 먼 길도 아니다. 서구가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왔던 민주화를 우리는 반세기 정도 되는 시기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켜 가고 있다. 그 사이에 우리는 힘겹게 반동적인 흐름들을 차단해 왔다. 그만하면 대한민국은 아주 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최근에 보이고 있는 행태는 소위 개혁 세력 스스로 반동적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두렵게 느껴진다.



원칙을 버리고 쉬운 성공에 집착하는 정치인들이 그 동안 민주화 시대에 쌓아올린 경력을 기화로 지역을 기반으로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된 정치 자영업자 조직에 편승하려는 반시대적 시도를 시작하고 있다.

거기에 개인적인 상실감을 정치적으로 빨리 보상받고 싶어하는 듯한 국참연같은 순진한 조직이 힘을 거들 경우, 그 사이 유시민 의원을 중심으로 힘겹게 밀어온 당내 개혁 세력의 노력은 무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노무현을 만들어낸 정신 자체가 완전히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삶을 구성하는 가치들은 그것이 극심한 투쟁을 거쳐 얻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안전한 맥락 위에 실려있지 않다. 그것은 시대의 특수성이라는 선을 따라 끊임없이 흔들린다.

상황의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통찰하되, 그것을 공시적 관점으로 꾸준히 미세조정하지 않으면, 열린우리당 내의 특정 계파가 작금에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반동적 행태로 퇴행할 위험이 언제나 있다. 개미들이 움직여야 한다.

권력을 눈 앞에 둔 자들은 갑자기 근시가 된다. 그들을 각성시키는 것은, 개미들의 부지런한 깨물기 뿐이다. 이번 열린 우리당 당의장 선거 결과에 경각심을 느낀 개미들은 당장 기간당원으로 가입해야 한다.

그것이 반동적 흐름을 차단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비관주의에 매몰되지 말자. 그러나 낙관주의 또한 금물이다. 지진은 아주 작은 흔들림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980년 광주의 비참을 지켜보며, 나는 그렇게 썼었다.

“그들이 우리의 낙관주의 쪽으로 먼저 문을 닫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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