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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은 과연 ‘혁명적’이었는가

강산21 2009. 2. 17. 19:26

이란 혁명은 과연 ‘혁명적’이었는가

기사입력

2009-02-13 18:07 

 

 
[한겨레21] 이슬람권 전역에서 일종의 대안모델로 떠오른 혁명 30주년, 내부에서 조금씩 변화의 기운이…

1979년 2월1일 오전 9시33분께. 이란 수도 테헤란의 엘부르즈산 상공을 세 바퀴째 선회하던 항공기 1대가 마침내 메라바드 공항 활주로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파리발 ‘에어프랑스’ 전세기였다. 이윽고 출입구가 열리자 검은 터번에 흰 수염, 발목까지 가리는 긴 옷을 입은 일흔여덟 노인이 승무원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트랩을 내려왔다. 15년여에 걸친 망명생활을 접고 마침내 귀국길에 오른 이란의 정신적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당시 기사에서 “위태롭게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달았던 이란 혁명의 극적인 클라이맥스이자, 새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라고 썼다.

전통으로 되돌아간 ‘혁명’

‘독립, 자유, 이슬람공화국’을 기치로 1년여 동안 계속된 국민적 저항은 그해 1월16일 리자 팔레비 국왕의 ‘출국’으로 이미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공항에서 출발한 호메이니 일행이 ‘혁명의 순교자들’이 묻힌 베헤슈트 자흐라 공동묘지로 향하는 길 30여km엔 600만여 이란인들이 쏟아져나와 ‘거룩한 분의 귀환’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호메이니는 이날 베헤슈트 자흐라의 ‘17번 묘역’에서 먼저 간 이들의 영령을 기린 뒤, 운집한 군중에게 30여 분에 걸쳐 격정적인 연설을 토해냈다. “국민들이 직접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외침에 공동묘지를 가득 채우는 것으로 답하는 게 당신들(지미 카터 미 행정부)이 말하는 인권인가?”

호메이니의 귀국 열흘 만인 그해 2월11일, 팔레비 왕조의 마지막 보루이던 이란 군부가 마침내 ‘정치적 중립’을 선언했다. 혁명은 그렇게 ‘꽃’으로 피어났다.

석유자원 국유화 정책 등으로 국민적 지지를 받던 모하마드 모사데크 총리 정부가 미 정보기관의 개입으로 무너진 게 1953년이다. 이후 친미 성향을 더욱 노골화하며 철권통치를 이어온 팔레비 왕조도 이날 막을 내렸다. 입헌군주제는 폐지됐고, 그해 4월1일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여명의 열흘.’ 매년 2월1일부터 11일(혁명기념일)까지 열흘간 이란은 이슬람 혁명을 기념하는 축제를 벌인다. 이란력으로 윤년인 올해는 지난 1월31일 신새벽에 축제가 막을 올렸다. 호메이니가 이란 땅에 내려선 시각에 맞춰 이란 전역의 이슬람 사원과 학교에선 일제히 사이렌을 울린다. 운행 중인 열차와 선박도 기적 소리로 화답한다. 메라바드 공항에서 베헤슈트 자흐라 묘지까지 이어지는 거리는 헬리콥터 2대에서 흩뿌린 꽃으로 수놓아진다. 1982년 시작된 파즈르 국제영화제를 비롯해 각종 연극·음악 공연도 이 기간에 집중된다. 〈AFP통신〉은 “특히 혁명 30주년을 맞은 올해엔 1천 명의 미술인이 30개 그룹으로 나뉘어 혁명을 기리는 3천m짜리 대형 그림을 제작한다”며 “영화계도 다큐멘터리 30편과 단편영화 30편, 영화 사운드트랙 30곡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전했다.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이란어과)는 혁명 30년의 역사를 이렇게 짚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의미의 서구화·근대화에 반대해, 이란과 이슬람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으로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 됐다. 공화국은 정치를, 이슬람은 삶을 각각 규정한다. 말하자면, 이슬람공화국 수립을 통해 이슬람식 근대제도가 마련된 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을 휩쓴 아랍민족주의와 아랍식 사회주의가 몇 차례 중동전쟁 패배로 쇠퇴해가던 무렵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면서, 이란식 정치체제는 이슬람권 전역에서 일종의 대안모델로 떠오르게 됐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주의 단체들이 최근 몇 년 새 잇따라 정당으로 탈바꿈해 선거를 통한 집권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란 모델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애초 대부분의 중동 전문가들은 신생 이슬람공화국의 ‘장수’를 예상하지 못했다. 안팎의 도전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화국’을 선포한 지 8개월여 만인 1979년 11월4일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열혈 청년들이 점거하면서 첫 번째 위기가 싹텄다. 이 젊은이들은 미국인 52명을 억류했고, 그렇게 시작된 ‘이란 인질 사태’는 444일이 지난 1981년 1월20일에야 풀렸다. 미국과의 30년 극한 대립의 시작이자, 이란 고립화의 서막이었다.

미국인 억류 이듬해인 1980년부터 이란은 이라크와 8년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란-이라크전은 사담 후세인 정권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빌미가 됐고, 제1차 걸프전에 이어 13년여에 걸친 경제봉쇄가 뒤를 이었다. 봉쇄의 끝은 대테러 전쟁으로 이어져, 후세인 정권의 몰락과 이라크의 혼돈을 불러왔다. 배리 루빈 ‘글로벌 국제문제 연구소’(GLORIA) 소장은 이란이 혁명 25주년을 기념한 지난 2004년 6월치 <중동 국제문제 리뷰>에서 “이란 혁명은 지난 25년 세월 동안 중동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격변”이라며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현 중동 정세를 만들어낸 3개 전쟁이 모두 이란 혁명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미국과의 대치가 기이한 ‘적대적 의존’으로

혁명의 과실은 어떨까? ‘3대 구호’ 중 하나였던 ‘이슬람공화국’은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혁명 10주년을 맞은 1989년 호메이니가 숨진 뒤에도, 그의 후계자인 사예드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를 중심으로 한 지도부는 건재하다. 하지만 ‘독립’은 요원해 보인다. 냉전 시절 미국과 맞서기 위해선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미국과의 대결 구도는 걷히지 않았고, 이란은 유럽연합과의 연계에 골몰해왔다. 미국과의 끝없는 대치가 기이한 형태의 ‘적대적 의존’으로 귀결된 게다.

‘자유’는 어떤가?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에 자유는 없었다. 여성들의 권리와 사회 참여가 그 시절보다 나아진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유달승 교수는 “이란에선 신문 1천여 종, 잡지 2천여 종이 발행되고 있고, 각종 정치단체도 기관지를 통해 활발하게 정치적 견해를 내놓고 있다”며 “언론 탄압이 있긴 하지만,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언론의 자유와 소통의 폭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나라는 중동 전역에서 이란이 유일하다. 그럼에도 문제는 ‘시간의 무게’다. 벌써 30년 세월, 이슬람공화국이 이룬 성과는 과연 ‘혁명적’인가?

혁명 30주년, 테헤란의 거리에서 다시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극한 대립으로 일관해온 부시 미 행정부가 물러나면서 국제 정세가 바뀌고 있다. 선거운동 기간에 이란과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수 있다고 밝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이란이 주먹을 편다면, 미국은 손을 내밀 것”이라며 대화를 제안했다. 마누셰 모타키 이란 외교장관도 지난 2월1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 참석해 “미국의 정책이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바뀐다면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숙원’을 풀기 위한 호조건이다.

6월 대선, 조금 다른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

나라 안에서도 변화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애초 2005년 6월17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 1차투표에서 19.43%의 득표를 얻으면서 2위에 그쳤다. ‘온건 보수파’로 불리는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보다 50만 표가량 뒤처진 게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 뒤 치러진 결선 투표에서 그는 61.69%의 득표를 올리며 낙승했다. 보수 성향의 표가 그에게 몰린 탓이다. 하지만 오는 6월 치러질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선 조금 다른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집권 보수 진영 내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정점으로 한 세력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신보수’ 진영이 벌써 2년여째 은밀한 권력투쟁을 이어온 탓이다.

이란 헌법은 국가의 상징인 ‘최고지도자’를 간선제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 선거인단 노릇을 하는 게 ‘마즐리스 에 호브레간’(전문가회의)이다. 직접 투표로 선출되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모임인 전문가회의는 모두 86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란에서 사실상 최고의 권위를 지닌 일종의 ‘원로원’으로 볼 수 있다. 지난 2006년 12월15일 치러진 제4차 전문가회의 선거에선 작은 파란이 일어났다. 보수강경파 성직자이자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인 아야톨라 모하마드 타키 메스바 야즈디가 전문가회의에 합류하면서 전면에 나선 게다.

야즈디는 이듬해인 2007년 7월 아야톨라 알리 메슈키니 전문가회의 의장이 숨지자, 자신의 측근인 아야톨라 아마드 자나티를 의장 후보로 내세웠다. 하메네이의 건강 이상설이 나돌던 시점이어서, 야즈디 진영의 이런 움직임은 ‘차기’를 노린 포석으로 해석됐다. 당시 의장 투표에서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이 11표 차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하메네이 진영의 반발을 산 것은 당연했다.

이런 분위기는 같은 해 10월 하메네이의 측근인 알리 라리자니 이란 핵 협상대표의 사임을 둘러싸고 더 직접적으로 표출됐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란이 핵무장을 하면 3차 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며 위기감을 키우고 있었다. 이란 정부의 강경한 자세 탓에 협상 진척이 어려워지자 라리자니는 항의의 뜻으로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이를 수리하고, 자신의 측근인 사예드 잘릴리를 후임으로 앉혔다. 이에 이란의 의회 격인 마즐리스 의원 290명 가운데 절반을 훌쩍 넘긴 183명이 공개 서한을 통해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다.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게다.

이란 대선까지 앞으로 다섯 달여,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이미 재선 도전을 선언했다. 개혁파 진영에선 하타미 전 대통령의 출마를 독려하고 있다. 하메네이의 보수 진영이 ‘최고지도자 직선제’를 주장하는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쪽도 앞선 대선 때처럼 보수 쪽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긴 어려울 게다. ‘독자후보론’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2005년 하타미 전 대통령과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맞붙은 이란 대선은 보수의 단결이 승부를 갈랐다. 2009년 대선에선 보수의 분열이 당락을 가름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의 정권교체’가 ‘테헤란의 정권교체’로 이어진다면, 지난 30년 동안 이란을 옥죄온 봉쇄의 사슬이 풀릴 가능성은 높아질 게다.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만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