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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평가 -완전한 실패에서 새로운 희망까지

강산21 2009. 2. 13. 17:19

노무현 정부의 평가
-완전한 실패에서 새로운 희망까지

  

 
김두수(사회디자인연구소 상임이사)

  

  
1. 드디어, 평가의 때가 왔다.

  

이제는 평가를 해야 한다.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물러가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되었다. 노무현 정부를 평가하기에 딱 좋은 때가 되었다. 되돌아보면, 한국정치사에 ‘노무현 시대’만큼 격렬한 투쟁과 논쟁이 있었던 시기는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연속이었고, 정말 하나같이 드라마틱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2002년, 민주당 국민참여경선과 노풍의 폭발, 김영삼 시계사건과 지방선거 재보궐선거 패배, 후단협의 탄생과 후보지위 위태,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와 단일화 철회,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 있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과정이 하도 극적이라서 집권과정에서는 순탄했으면 좋겠다는 순진한 상상도 있었다. 그 뒤, 노무현 정부 5년은 더 극적인 사건으로 ‘격동’(?)의 한국사를 만들어냈다. 대한민국의 역동성! 대한민국 정치의 역동성을 노무현 정부 집권 5년 동안 다 모두다 보여 주었다. 대강의 흘러간 과정만 보아도 그러하니 역사적 평가나 정치적 평가는 얼마나 다양하고 극단적일 지 충분히 상상하고 남을 것이다. 평가를 제대로 올바로 할 능력 여부는 차치하고, 정치를 공부한 사람이나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뜨거웠고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시대’에 빠져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평가를 시작할 수 있을까? 노무현 정부인가? 노무현 정권인가? 노무현 시대인가? ‘정권(政權)’이라는 용어는 대통령과 권력의 핵심을 이루는 정치세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좁은 개념이다. ‘정권’은 주로 독재시대의 1인 통치자의 권력을 초점으로 정리하는 개념이므로, ‘정권’을 평가 분석의 기본 단위로 하기에는 권력의 핵심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구분하기가 무척 어렵다. ‘정부(政府)’를 정권보다는 더 넓은 개념으로 본다. 여기에서는 <노무현시대의 좌절/ 2008/ 창비>에서 제시한 대로 ‘노무현 정부’를 초점으로 평가하겠다. 다만, <노무현시대의 좌절>이라는 책 제목에서 약간 걸리는 부분이 있다. 한 ‘시대(時代)’의 좌절이라고 하기에는 좀 비약적 측면이 있다. 책의 저자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혀둔다.

  

  
2. 노무현 정부의 시대적 과제는 무엇인가?

  

<노무현정부의 평가: 예견된 실패?(이후 ‘평가: 예견된 실패?’로 사용한다)>에서 제시한 ‘노무현 정부를 평가하는 타당한 기준으로 1) 시대적 과제의 인식 2) 대외정세 파악 3) 주체적 역량 발휘의 세 부분으로 구성하는 것’에 동의한다. 역사적 흐름의 맥락에서 노무현 정부에게 부여된 시대정신,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평가하는 주체마다 자의적 기준으로 평가하게 된다. 특히 <평가: 예견된 실패?>에서 시대적 과제를 제1기준으로 삼은 것은 대단히 잘한 일이다. 시대적 과제로 “개방의 조건하에서 성장과 복지를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노무현 정부 평가에서는 최초로 제대로 제기하는 문제의식이다. 이런 평가가 나오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세계화의 진전에 따른 개방의 조건하에서 지난 수십 년간 지속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그리고 그 성과를 고루 나누는 분배와 복지의 과제를 동시적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도로 복합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고 구체적인 설명까지 달았다. 지금까지 노무현 정부는 ‘개방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는 시대적 배경에서 출현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진보학자들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파격적인 평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평가: 예견된 실패?>가 시대적 과제를 설정하는데 오류가 있다고 본다. “개방의 조건하에서 성장과 복지를 어떻게 실현하는가”가 시대적 과제라고 설정한 것은 사후적 평가의 오류라고 본다.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끝난 시점에 의한 결과론적 평가를 하는 과정에서 시대적 과제를 잘못 설정한 것 같다. 지난 2002~3년의 시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2008년의 시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2003년의 시점에서는 그 누구도 “개방의 조건하에서~”라고 시대적 과제를 설정한 사람이 없다. 그것은 참여정부의 국정지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에서 발표한 <국정비전과 국정과제>에는 첫째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둘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셋째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가 3대 국정목표라고 하고 있다. <평가: 예견된 실패?>에서 “과제만 나열되고 있을 뿐 이들 간의 상호관계는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 정책수단들도 체계적으로 연계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하면서 “노무현 정부는 시대적 과제를 집약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브랜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노무현정부에서는 대표적으로 브랜드가 없다”고 했다. 일단은 맞는 말이다.

    

노무현 정부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민주화의 성과다. 이남주 교수가 표현한 대로 노무현 정부는 “정통 민주야당을 주체로 한 김대중 정부의 계승인 동시에 한국정치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대를 받고 출발”한 정부다. 김대중 정부는 IMF외환위기와 ‘자민련’과 연합으로 탄생하였기 때문에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특히 3김정치는 1인 사당정치, 권위주의체제에 기반을 둔 제왕적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정치개혁의 욕구가 여전했다. 이런 과제가 있었기에 노무현은 제왕적 시스템을 혁파하고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해결사를 요구하는 국민의 바람으로 등장한 것이다. 당선된 후, 노무현 정부가 ‘참여정부’를 표방했는데, 이것은 김대중 정부의 ‘국민의 정부’라는 민주주의 주체와 ‘참여정부’라는 민주주의 방법, 형식을 정리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시대정신을 표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노무현 정부는 싫든 좋든 김대중 정부의 2기, 후반기 성격을 정부의 탄생 순간에 내포하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고백했다고 알려진 말에도 그 성격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새 시대의 첫차가 되고 싶었으나 알고 보니 구시대의 막차가 되는 운명이더라.”

    

노무현 정부가 제시한 3대 국정목표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숙고해 보면, 시대정신과 시대적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국정목표에서 제시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와 민주주의 그리고 균형발전사회’가 가능하려면 철저한 국가개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의 시대적 과제는 전환기의 한국사회의 목표에 맞추어져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과제인 “한국사회의 전면적 구조개혁”이었다. 특히 정치 분야에서는 제왕적 체계를 혁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참여정부 5년 내내 격동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제와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왜 전쟁(?)이었을 지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는데 몇 가지 오류를 범했다. 첫째, 대통령의 개인적이고 유가(儒家)적 발상의 한계이다. 권위주의 체계인 제왕적 시스템 극복은 제도적 장치와 광범한 국민적 참여라는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압력으로 개혁적 조치들을 과감하게 추진해야 하는데 대통령 본인 혼자서 권력을 놓아버리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발상이야말로 노무현 대통령답지 않은 아마추어적 발상이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권력기관을 문민 통제하라고 위임해 주었다. 위임한 권력을 통해 권력기관을 통제하기 어렵다면 당연히 권력을 통제하는 원칙에 따라 국민의 직접적 통제가 가능하도록 설계변경을 했어야 했다. 선량한 대통령에 의한 선량한 권력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동양적 정신만으로 가능할까? 아무튼 노무현 정부 평가에서 아직도 긍정적 요소로 지적하지만, 제대로 된 권위주의 청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자 권력기관이 제일 먼저 ‘권위주의 시스템’으로 복귀하였고, 사회 전반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권리가 급속히 후퇴하고 있다.

   

둘째, 제왕적 권위주의 체제라는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주목하지 못했다. 제왕적 시스템이 있어야 한국사회는 돌아간다. 제왕적 권력으로 사람들의 갈등과 이해를 강제적으로 조정, 통제할 수 있는데, 권력을 놓으면, 극단적 주장과 행동을 제어할 방법을 상실하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4대 권력을 국민의 품에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권위주의 권력을 포기했지만, 대한민국은 권위주의 시스템으로 40년 이상 운영되어왔다. 40년 체제로 굳어온 실제와 실물은 권위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는 현실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손을 놓아버리면서 나타난 부작용은 너무나 많았다. 우리 ‘사회디자인연구소’에서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는 문제이지만, 한국사회는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 좌우파의 이념논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익집단의 이전투구에 가깝고, 정치를 통해서 장악할 수 있는 정부와 공공영역, 공기업 등의 이익과 영역이 여전히 많기 때문에 치열한 정치투쟁이 일어난다. 최근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과 투자기업 등 정권의 영향을 받는 곳이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자기사람 심기에 급급하고 있다는 것은 아프리카식 도적정치와 진배없다. 

   

셋째, 준비되고 체계적인 권위주의 체제 청산 로드맵이 없었다.  권력기관을 정확하게 국민의 품에 돌려주는 프로젝트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다.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으로 탈권위주의 의지는 보여주었지만, 국민들이 참여하는 검찰개혁이라는 제도적 접근은 없었다. 단순화하면, 1회성 이벤트처럼 되어 버렸다. 기득권 세력은 곳곳에서 시비를 걸었고 다수의 힘으로 탄핵을 시도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했다. 기득권 세력이 연합하여 대통령을 탄핵하는 초유의 현상을 국민의 눈으로 목도하고서야 시대적 과제로 되돌아 왔다. 국민은 야당을 철저히 심판했고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었다. 총선에서 다수의식을 획득하고 나서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할 수가 있었다. 4대 개혁입법 추진에 대해 민생입법은 팽개치고 정치입법이라고 공격했지만, 기득권을 보호하기위한 정치적 방어망에 불과했다.

    

넷째, 권력기관을 통제하고 조정할 힘과 능력이 없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일한 책임자급의 발언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이 권력기관을 실제로 통제할 방법이 없더라”고 했다. 실질적인 힘이 없더라도 대통령으로서는 황금 같은 집권 1년을 활용하여 시대적 과제인 목표물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집중전략을 펼쳤어야 했다. 물론 집권 1년 동안 거대한 다수당 한나라당이 집권야당(?)으로 버티고 있었다는 객관적 현실이 존재한다. 그러나 정치 전략을 올바로 세우고, 실천할 인재를 배치하여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실무적, 실천적 활동은 별로 없었다. 국민 참여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없었다.

   

노무현 정부의 집권 초기와 후반기의 시대적 과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집권 초기의 시대적 과제는 ‘한국사회의 전면적 구조개혁’이었고 그 중에 정치 분야는 ‘제왕적 시스템’의 타파는 확실하다. 김대중 정부의 권위주의 형태에서 제왕적 권력을 타파하기로 한 상태에서 집권한 대통령이 제왕적 시스템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가? 에서 과도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국가는 제왕적으로 돌아가는데, 통치는 개인적 차원에서 민주적으로 운영하면서 발생한 갈등이 압축적으로 폭발하면서 노무현 정부의 지지도는 급락했다.

  

  
3. 진보개혁세력은 어떤 세력인가?

  

노무현 정부의 평가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진보개혁세력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배신론’이다. 노무현 정부가 정책을 수행하면서 진보개혁세력을 배신함으로써 노동진영과 대립, 시민사회와 대립, 녹색 환경운동과의 대립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며칠 전 시민단체 출신 국회의원의 토론을 지켜보면서 ‘노무현의 배신론’이 여전히 유효한 평가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노무현의 배신론 근저에는 많은 오해와 오류가 쌓여있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살펴보자.

  

<노무현시대의 좌절>에서 일관되게 ‘진보개혁세력’을 새로운 정치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성격도 진보개혁세력의 테두리 안에서 보고 있다. 진보개혁세력이 주체라는 관점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생에서 찾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고, 실질적 민주화의 과제를 실현하기에 적임자였다. 초기의 노무현 정부의 구성에서는 진보개혁세력의 참여는 당연한 것이었다. 87년 민주화 이래로 넓은 의미에서 ‘민주대연합’노선에 따라 진보개혁세력을 한축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선거 시기마다 또 다른 진보정당을 추진하는 세력의 독자적 노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례적으로 범 진보개혁세력이 우익보수세력에 대항하는 전선을 형성했다. 하지만,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탄생은 진보개혁세력의 분리와 독자적 영역을 상징한다. 진보를 표방하는 새로운 정당이 원내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강령과 주요 정책이 명백하게 다른 정치세력이 국회에 등장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도 정치적 지지가 분화되지 않았지만, 2004년을 경과하면서 정치적 주장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 점을 잘 살펴보고야 ‘진보개혁세력’의 실체와 향후 방향을 제대로 설정할 수 있다.

   

초기 노무현 정부의 구성에 ‘진보개혁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가와 전문가가 많이 합류한 것은 사실이다. 초기의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네덜란드 모델이나 북구형 모델에 대한 모색이나 이정우 실장의 존재는 진보적으로 중심축이 형성되었음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평가를 살펴보면, 진보개혁세력의 전문가들이 청와대 비서조직과 각종 위원회 등에 배치되었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주도권이 관료들 쪽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공통된 분석이다. 왜 그랬을까? 크게 보면, 두 가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첫째는 능력이 부족하고 전문성이 부족해서 밀려나왔거나, 둘째는 철학이나 가치, 생각의 편차가 발생하면서 함께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개별적 사유는 잘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추론해 보면, 주로 두 번째 사유로 인해 첫 번째 현상이 발생하였다고 본다. 노무현 정부의 후반기로 가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노무현, 또는 노무현 정부가 배신한 것일까?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진보개혁세력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철학과 가치, 정책의 차이점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의 한 예가 앞에서 이야기한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다. 누가 옳고 그르다는 점을 넘어서서 살펴볼 때, 극단적 예가 한미FTA의 추진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노무현 정부의 배신이라고 말할 때, 원래부터 철학과 가치관이 다른 세력일 때는 배신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 정치권의 이념 분포와 지형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이러한 오해와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한국 정치권의 이념분포에서 첫 번째 잣대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다.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자본주의 탄생과 발전에 함께 하는 역사적 개념이다. 국가의 개입과 공적 소유를 기본 강령으로 하면 좌파다. 시장의 자율과 개인의 소유를 기본으로 하면 우파다. 원내에 진출한 정당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한국에서 좌파는 민주노동당이 유일하다. 나머지 정당은 다 우파다. 두 번째 잣대는 진보와 보수다. 진보와 보수는 언제나 변화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에서는 엄밀성을 위해 ‘중도’는 없다고 가정한다. 진보는 미래의 변화를 위해 바꾸자는 세력이고, 보수는 과거의 좋은 것을 지키자는 세력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적 가치와 사회개혁을 우선하는 가치로 보는 세력이 진보다.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화를 억압하거나 기득권을 지키자는 세력이 보수다.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은 보수이고 나머지는 진보다. 종합 정리하면 좌파에는 극좌 보수 진보가 있고, 우파에도 극우 보수 진보가 있다. 민주노동당은 좌파 진보다. 민주당과 창조한국당은 우파 진보와 보수가 섞여있다. 당시 열린우리당도 민주당과 비슷한 이념 구분 범주에 든다. 한나라당과 선진당은 우파 보수와 극우가 섞여 있다. 그 분포의 부피나 포진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넓게 분포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이념구분은 오히려 쉽지만, 정치적 지형은 더욱 복잡하다. 한국의 역사적 후과에 따라 정치에서 좌파는 생존하기가 극도로 힘들다. ‘진보개혁세력’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 개념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좌파 우파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진보의 개념으로만 구분하면 정당의 이념적 위치를 착각하게 된다. 그래서 ‘진보개혁세력’이라는 국민적 지지기반을 이야기할 때는 어느 정도 객관적 분석이지만, 정치세력과 정당의 구분에서는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의 인물 구성의 변화는 이런 정치적 지형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노무현시대의 좌절>에서 말하는 진보개혁세력은 동일한 정체성에 기반을 둔 실체가 아니다.

  

  
4. 노무현 정부의 실패로 지지율이 하락했는가?

  

지지율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의 근거이기도 했고 결과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형편없이 추락하는 것이 꼭 한국적 상황만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지지도 등락은 변화무쌍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당시 48%의 득표를 기록했지만, 지지자의 구성을 정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전략적 기조에서 지지율에 대한 착각이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노무현 단독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 효과로 쟁취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지지자 25~30%와 정몽준 지지자 25% 전후의 결합으로 정권 장악했다. 노무현의 25% 지지자는 전통적 지지자로 호남지역과 호남 출신 그리고 수도권 개혁세력이었고, 정몽준의 25%는 단순하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경험으로 기존 관습을 싫어하는 쿨한 세대와 민족적 자부심을 중시하는 애국주의의 영향, 월급쟁이 소시민으로 구성되는 중산층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노무현의 정부의 지지기반은 원천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집권 5년 동안, 열린우리당은 지지율에 따라 대통령과의 관계가 춤을 추었다. 지지율에 따라 ‘친노와 반노와 비노’의 분포가 이동하였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 변화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후보과정에서도 큰 폭의 등락을 경험했듯이 취임하고 100일 이내에 지지율이 급락 현상이 있었다. 탄핵의 고비를 넘기고 고공행진도 아주 짧은 순간으로 마감하고 20~30%대에 머물렀다. 재보궐선거가 있기 전에 지지도가 상승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으면, 영남권 재보궐선거에서 낙선하는 결과에 따라 다시 지지도가 하락하는 악순환 고리로 빠져들곤 했다. 이것은 노무현 정부의 취약한 지지기반 때문에 발생한다는 진단을 증명한다. 정대화 교수의 지적대로 지지율 급락의 원인은 지역연합이나 정치사회적 연합의 구속이 없는 상태에서 출현한 ‘순수권력’이라는 노무현 정부의 권력구조상의 특징으로 저항세력을 강화시키고 지지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타당하다.

    

정대화 교수의 지적을 시간 순으로 배열해서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첫 번째가 취임과 동시에 대북송금 특검 문제가 발생했는데, 정치적 미숙과 한나라당의 꾐에 빠져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호남지역 유권자를 격분하게 하였다. 두 번째는 “반미면 또 어떠냐?”라고 해서 자주의식의 극치를 보여주더니 미국 방문 때, 포로수용소 발언으로 진보 성향그룹을 뜨악하게 만들었다. 방미의 결과물에 연동되어 이라크 파병 수용과정에서 대국민 설득과정을 생략해 버렸다. 세 번째는 5월 광주민주화 기념식 때, 한총련 시위와 화물연대 파업, 철도파업에 따른 “대통령 노릇 못하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는 발언으로 극우 언론은 선동의 호기로 삼았고, 이에 노동자층은 노동자층대로, 중간층은 중간층대로 실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여정부의 경제상황과 민생관련 지표와 통계는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 각종 기록의 측면에서 볼 때, ‘경제가 죽었다’는 선동만큼 허무맹랑한 것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원인으로 첫째 지지기반의 취약, 둘째 비우호적인 언론 환경과 적대적 매체의 공격, 셋째 대통령의 원인제공 등이었다. 결국 정책의 실패여부를 지지율로 환산하여 보는 것만큼 허구도 없지만, 보수수구 언론의 프레임에 따라 국민들은 편리한 방법으로 노무현 정부를 평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과연 노무현 정부는 ‘삼각축 전략’을 사용했는가?

  

이남주 교수는 <노무현시대의 좌절-잘못된 정치 전략과 지지기반의 와해>에서 노무현 정부가 초기 진보개혁세력의 적극적 동원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에서 미국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트라이앵귤레이션(triangulation) 전략(이하 삼각축 전략으로 기술함)과 유사한 전략으로 전환하였다고 한다. 이남주 교수는 노무현 정부와 개혁진보세력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았다는 진단을 함께 하고 있다. 2003년 6월 철도파업과 2003~4년의 이라크 파병 문제로 노동진영 사이의 균열, 시민사회의 균열이 심화되자 관계를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현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에 나도 대체로 동의한다. 덧붙여 이남주 교수는 “2007년 2월 17일, 노무현 정부가 유연한 진보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기존 진보개혁노선의 계승이 아니라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향은 삼각축 전략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했다. 또한 “유연한 진보로 지칭하든 아니든 새로운 진보이념의 구성을 위한 노력 자체를 노무현정부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비전을 발전시키고 구현할 수 있는 정치 전략의 부재했거나 잘못됐던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직시할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새로운 진보의 모색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 평가에서 이점에 주목하거나 긍정하는 평가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의식을 정치 전략상 삼각축 전략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삼각축 전략을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시절, 여론조사에 기반을 둔 우파 이슈 뺏기로 한정하지 않고, 영국의 노동당이나 엔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모색까지 확장하여  삼각축 전략이라고 한다면 노무현 대통령도 삼각축 전략에 동참한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그러나 시대정신에 주목하여 현재의 한국사회의 개조에서 시작한 문제의식이라면 새로운 진보의 필요성을 ‘정치전략’으로 격하시키는 오류에 빠질 것이다. 나에게 이남주 교수가 지적하는 “정치 전략이 부재했거나 잘못됐다”는 것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정치 전략의 부재를 선택하겠다. 새로운 진보의 필요성에 주목한 것은 잘못된 방향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임에 틀림없다.

  

이남주 교수는 ‘삼각축 전략’에서 방향설정이 잘못됐다고 한다. 한국은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진보개혁진영의 기반은 점차 확대되는 과정에 있었는데, 엉뚱하게 보수 세력을 염두에 둔 의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지지기반의 균열을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앞에서 논술하였지만, 진보개혁세력이 확대되는 과정에 있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세력이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지 불분명하고, 또한 진보개혁세력의 정체성이 단일하지도 않기에 애초에 분열적 요소가 많았다.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은 좌우파 동시개혁을 진행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잘못된 방향은 반쯤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의 실수로 지지기반의 균열을 가져왔다기보다는 결정적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와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사이에서 국정의 목표와 단계를 공유하지 못한 것에 있지 않을까?

   

‘삼각축 전략’ 자체의 옳고 그름은 다른 차원에서 보강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실질적으로 ‘삼각축 전략’을 사용하였는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 정치 전략을 ‘삼각축 전략’이라는 개념적으로 정립한 자료를 보지 못했고, 정치 전략을 추진한 실무주체가 존재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또한 청와대의 정무능력으로 봐서는 ‘삼각축 전략’을 개념화하여 새로운 진보이념의 구축이라는 전략을 추진했을 것 같지도 않다. 열린우리당 개혁파에서 간부급에 속했던 나 자신도 청와대의 정치 전략을 공유해 본적도 없다. 이남주 교수는 ‘삼각축 전략’으로 개념화하여 분석하는 수고를 하였지만, 정작 추진한 사람들은 ‘삼각축 전략’을 생각해 보았는지 의문이다.

  

  
6. 노무현 정부의 주체적 역량 평가는?

  

주체역량에서 첫째, 집권세력 내의 핵심집단의 구성과 결속력, 준비정도를 파악하면,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든 편일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벤처기업이 대성공을 하여 대기업으로 확장된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벤처기업 수준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가 쉽게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벤처가 대기업으로 발전할 때가 가장 위기라고 하듯이 취임 직후가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역대 청와대와는 상당히 다른 구성력을 가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호흡을 맞추어오던 세대는 6월 항쟁 세대, 소위 ‘386’으로 표현되는 세대였다. 당연히 청와대 비서진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초기도 경험 미숙과 준비부족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언론의 공격이 굉장했다고 한다. 당시의 청와대도 참신한 사람들로 짜다보니 여성대변인이 군사용어에서 실수하면서 기자들의 밥이 되는 수모를 당했다.

    

둘째, 정치적 행정부와 집권여당을 중심으로 하는 파워블럭의 정책수립 및 지원 능력은 각자 따로 국밥처럼 놀았다. 열린우리당은 선거연합당의 성격을 띠고 탄생했다. 초선이 108명이나 되었고, 다양한 계층과 출신에서 국회의원들이 탄생했다. 집권 초반기 과제인 정치개혁의 과제를 수행하기에 한계가 많았다. 위원회 조직은 행정부 조직의 견제로 적극적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결국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야할 로드맵의 작성으로 세월을 보냈다. 복잡한 현실적 과제 해결에 있어 기존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개혁진보진영의 활동가들도 집권 이후의 정책수립과 실행영역에서는 별다른 전문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셋째, 핵심집단이 마련한 국정목표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패키지의 준비정도를 평가해야 한다. 상위목표와 하위목표, 목표와 수단 간의 체계성과 정합성, 일관성이 중요한 기준이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국정목표를 정확하게 브랜드하지 못함에 따라 각 과제가 분리된 채, 개별화되어 추진되는 사례가 많았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오면서 시대적 과제가 전환 이동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존에 설정된 대로 추진되기도 하고 새로 재정립해야 하기도 했다. 지방균형발전 등은 기존의 계획대로 추진되었지만, 새로운 양극화 현상과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전진에 따라 추진과제가 수정되기도 했지만 체계성과 일관성의 관점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넷째, ‘정치적 행정부’가 얼마만큼 관료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가? 진보개혁세력의 분립, 시대적 과제의 전환에 따라 기능적으로 전문화되어 있던 관료조직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참여정부에서는 관료출신 장관들이 상당한 숫자로 배출되었다.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재경부 등 경제부처의 영향력이 컸으며, 후반부로 갈수록 경제부처는 재정 금융 분야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정치적 행정부에서 주도권을 발휘했다.

    

다섯째, 한국사회에 상충하고 있는 다양한 이념적 계층적 지역적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합하는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한국 사회는 ‘제왕적 시스템’에 의해 통합능력을 발휘해 왔는데, 제왕적 권력이 없어지자, 각종 이익집단간의 난투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민주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대화와 타협의 정신은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했다. 대표적으로 화물연대 파업, 6월 철도 파업, 7월 부안 방사선폐기물 처리장 입지 선정, 새만금 간척 등을 둘러싼 갈등 해결 실패가 대표적 사례다.

   

여섯째, 국정목표와 정책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는데 얼마나 성공했는가? 언론과 방송을 통해 소통과 공론화를 형성하고 반대세력을 최소화하여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기득권 세력의 나팔수를 넘어 보수정당의 기획홍보위원회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언론사에 의한 불법행위에 강력한 처벌과 시민피해 구제사업, 여론 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법개정 적극 추진 등 확고한 언론정책을 실시하든지, 아니면 보수적 언론과 타협을 하든지 분명하게 했어야 하는데 언론과의 전쟁은 말로만 진행하다 보니, 보수언론은 극한 대결을 조장했고, 언론운동단체는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언론을 바로 잡는 일에 정권의 운명을 걸 정도로 치열하지도 못했다. 막판에는 ‘국정홍보처’에 의존하는 소극적 언론 정책으로 비웃음을 쌌다. 또한 한국의 지식인이나 언론인들이 정부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면 ‘어용(御用)’이라는 덫에 빠졌고, 조중동문을 제외한 신문들은 제대로 된 의제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프레임을 구축하는데 실패했다. 노골적인 사실 왜곡에도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평가: 예견된 실패?>에서는 “노무현 정부는 집권 초기에 시대적 과제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국정을 명확하게 기획하지 못했기에 대외정세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 측면에서도 집권세력(핵심집단, 파워 블록)의 미약, 정책패키지 준비 부족, 실행능력 취약,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정치적 능력 부족 등으로 이익 갈등과 관료조직 반대세력의 저항 등을 극복하면서 정책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했다”고 했다. 포괄적 지적에 동감한다. 다만, 나는 <평가: 예견된 실패?>에서 설정하는 시대적 과제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다. 또한 주체에서 개혁진보세력의 실체가 차츰 분화하여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본다. 관료조직과 진보개혁세력의 경쟁관계는 철학과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하고 싶다. 시대적 과제에 따른 국민적 합의도출에 실패하는 것은 지극히 편파적이고 당파적인 언론환경에서는 애당초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7. 노무현 정부의 오류와 한계의 구분이 필요하다.

   

시대적 과제를 ‘한국 사회의 전면적 구조개혁’이라는 브랜드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국정목표를 3개로 나열한 것은 오류일까? 한계일까? 노무현 정부의 집권세력 차원이나 당시 지식인의 인식차원에서 살펴보면, 한계에 가깝다. 5년이 경과한 지금의 시점에서 그때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이었는지 정리하기는 쉽지만, 당면한 현실에서는 정확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양극화의 현상이 한창 진행될 때는 누구도 양극화 대처법을 거론하지 못했다. 지금의 세계경제의 위기도 마찬가지다. 폴 크루그먼 같은 경제학자가나 선각자가 소리 높여 외쳤지만, 세계경제의 위기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한계라고 쉽게 규정하고 위로받자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시대정신을 제대로 설정하려면, 치열한 담론 생산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잡을 수 있다.

   
1) 첫 번째 기회 : 소수파 비주류 정부의 한계를 느끼다.
모든 개혁은 대통령 취임 1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1년 동안 개혁적 조치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의 취임 1년은 오류라고 하기보다는 한계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한나라당이 압도하는 여소야대 국회에서 민주당은 120여석에 불과하고, 당정분리를 분명하게 규정한 당헌을 가진 민주당을 정당개혁을 통해 바꾸어내야 하는 처지는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국회에서 소수당의 설움을 톡톡히 치렀다. 한나라당은 다수당의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미군 반대 한총련 시위로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을 해임하라는 건의안을 통과시키는 후안무치한 일을 저질렀다. 사실상 예비 탄핵을 실시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47명의 국회의원으로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결국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빅 사건까지 터졌다.

   
2) 두 번째 기회 : 개혁적 과제를 관철하지 못하자 정부 여당의 실패가 시작되다.
대통령에 대해 탄핵 발의한 상태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극적으로 승리했다. 47석에서 보면, 압승이지만, 과반수에서 2석 초과하는 다수당이 되었다. 열린우리당의 역사적 의무를 잘 몰랐다. 새로운 당의 성격은 민주당 출신, 한나라당 출신, 개혁당 출신, 시민사회 출신, 각계각층에서 모여서 만든 선거연합당이 분명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전면적 개조’라는 시대적 과제(정치적으로는 제왕적 시스템의 청산)를 수행하기에는 구성원의 이질적 요소가 많았다. 당 외부는 물론이거니와 내부에서조차도 ‘잡탕정당’으로 명명하고, 장기적으로 이념에 따라 분화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을 공공연하게 말했다.

   

정동영 의장이 총선 당선자 워크숍에서 ‘실용적’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자 당의 노선을 두고 ‘실용주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총선 후보자 공천과정에서 ‘실용파’를 대거 중용하고 개인의 친분중심으로 영입한 명망가 인사들의 성격과 연결되면서 ‘실용주의’는 권력 투쟁적 요소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정 분리정책’에 따라 집권당 안에는 3개의 태양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통령, 당의장, 원내대표라는 지도자가 탄생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다수당으로 출범한 첫 개원 국회에서 한나라당 출신의 선거법 위반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면서 다수당으로써 체면이 여지없이 구겨졌고 열린우리당의 국회의원들의 개혁적 성향이 의심을 받았다. 또한 당의장의 잦은 교체와 함께 책임성의 결여를 동반한 리더십의 부재가 왔다. 4대 개혁입법을 둘러싼 대 국회전략에서 무기력증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침몰해 가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 실패의 하나로 ‘당정분리’를 지적한다. 사실 ‘당정분리’는 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넘어올 때 자랑할 만한 개혁적 조치의 하나였다. 제왕적 리더십이라는 권위주의적 정치문화 극복의 대안으로 ‘당정분리’를 생각했다. ‘당정분리’의 핵심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제왕적 권력에 주어져있던 ‘공천권’을 당의 지도부에 넘기고, 사무총장을 통해 당을 지배하는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었다. 실체적 진실은 당과 청와대의 분리로 ‘당청분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정분리’라는 원칙을 통해 당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대통령의 권한에도 간섭하지 말라는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또한 청와대 내에 존재하는 정무기능의 부서를 통폐합하고 축소시켰다. 미국의 백악관은 1500여명의 직원 중에서 대의회 정무기능을 하는 직원이 50%가까이 차지하고 있는데, 한국의 청와대는 그 반대로 고작 20명 안짝의 인원으로 정무기능을 수행했으니 정무기능은 거의 없는 거나 진배없었다. 그러니 당정관계가 잡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남주 교수의 <잘못된 정치전략과 지지기반의 와해>에 의하면 노무현 대통령이 당정분리에 집착한 이유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불신, 부정적 태도, 잡탕정당의 한계에 주목하여, 정당문화를 변화시킬 주체로 노사모나 개혁당 세력을 상정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일 수 있다. 막연한 기대와 우호적 인식 그리고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간의 교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대통령의 청와대와 조직적 체계적 공조와 공감대는 5년 내내 없다가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제 폐지를 앞두고 2007년 1월달에 단 한번 청와대로 초청받아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3) 세 번째 기회 : ‘대연정’ 정국구상이 실패하다.

대연정 제안은 결정적 패착일까? 결과적으로 보면, 결정적 패착이다. 당시 가장 막강한 단결력을 과시하고 있던 한나라당이라는 정치세력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기를 살려준 제안이었다. 대통령의 제안으로 차떼기 정당, 부패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서 집권당과 연정을 할 정도의 정당이라는 이미지 개선의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공포심이 있었는데, 한나라당도 집권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정당으로 인식을 전환시키게 되었다.

    

당시 언론을 포함한 정치세력들은 연정의 의미를 당을 통합하는 수준으로 격상시켜서 사고했다. 내각제의 역사가 없고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 정치에 대연정의 의미가 제대로 해석될 수가 없었다. 한국의 정치문화는 대결주의가 기초를 이루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이런 가운데 갑작스럽게 공개적으로 제안해 버리니 애초부터 진지한 사고나 접근이 불가능했다. 모두 정치적 이익을 먼저 타산하는 정략적 사고를 기본으로 했다. 특히 박근혜는 여야회담이나 협상이 아니라, 국민 앞에서 선명성 경쟁을 펼치는 투사였을 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을 지역주의 정치를 타파하는 명분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 국민에게는 대통령이 될 때까지 그렇게 중요했던 지역주의가 노무현의 당선으로 인해 일차적으로 해소되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또한 지역주의 폐해가 2004년 총선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 극복되고 있다는 추세가 있었다. 각 당이 지역 독점적 지위를 누리지만, 자체의 물갈이는 항상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지역주의 극복을 정치 제1과제로 놓는 것에 동감하지 않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국민들이 느끼는 경제적 불안감, 양극화 현상이 도도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정치적 제안을 시급한 시대적 과제로 보지 않았다. 그 점에서 대연정 제안은 실패가 분명했다.

  

대연정 제안이 완전한 패착(?)이 된 것은 7월에 제안하고 영수회담 한번으로 9월에 철회해 버렸다는 점이다. 2달 만에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당내 소수파들은 대통령을 돕기 위해 ‘대연정’을 찬성하고 장기적인 운동으로 진행하기 위해 ‘특별기구’를 설치하기까지 하는데, 정작 제안을 했던 대통령이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면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가 되어 버렸다. 한국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시화하는 계기로 발전하지 못하고 일회성 이벤트로 전락하면서 대연정 제안은 진짜로 패착이 되어 버렸다. 대연정 논란으로 호남과 비호남이 갈리고, 친노와 반노가 나누어지는 현상이 촉발되었다.

   

일각에서 ‘대연정’이 아니라 ‘소연정’이 맞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이념적 편향에 따른 주장일 뿐이다. 소연정을 하려면 2004년 4대 개혁입법을 할 때 했어야 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에 대해 ‘가짜 진보(열린우리당)가 실패하면 진짜 진보(민주노동당)’가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항상 주요타격방향으로 열린우리당을 설정하고 있으니 열린우리당의 공격에 더 충실했고, 타협도 하지 않았다. 같은 야당이라는 정체성으로 한나라당과 공조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만약 소연정을 제안했더라면, 민주노동당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성사 가능성이 아주 낮았다. 다 지난 일에 덧붙이는 공상 같은 이야기이지만, 만약 소연정을 제안했다면, ‘유연한 진보’에 대해 본격적인 논쟁으로 발전하는 계기는 될 수 있었겠다.

   
4)네 번째 기회 : 한미 FTA 추진으로 진보의 좌우파를 나누다.

2006년 2월에 한미FTA 협상을 추진을 발표했다. 6개월 만에 대연정 때와 같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관계없이 열리우리당을 포함하고 있는 제 세력 간에 이념과 노선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당시까지 한미FTA는 집권당의 의제로 상정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집권세력 내부의 공론 과정과 추진 배경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는 가운데 대통령 주도의 강력한 정치적 이슈가 폭발했다.

   

결론적으로 한미FTA는 막연한 진보 진영의 개념 안에 좌파 우파의 관점에서 경제를 다시 볼 것을 강요하는 껄끄러운 문제제기였다. 세계화 추세 속에서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한국경제의 위치를 다시 가늠해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개방의 시기와 대상, 방법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던져 주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FTA를 추진했던 속뜻을 아직도 다 모른다. 구시대의 막차가 아니라 새 시대의 첫차의 의제를 선점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하는 느낌까지 든다. 오로지 경제적 필요에 의해 제기했다지만, 다분히 정치적 이유가 섞여있을 것이다. 이남주 교수의 <잘못된 정치전략>에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의제 제시와 정치연합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측한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국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고 ‘깜짝쇼’와 ‘빅이벤트’를 한다는 보수 세력의 비난이 늘 있어왔다. 아무튼 한미FTA는 올바른 전략일 수도 있고, 형편없는 패착으로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한미FTA를 제안한 근거에 얼마나 접근했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정치연합이나 새로운 정치적 의제 설정에 따라 정치적 지형이 변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제 새로운 진보의 재구성에서 한미FTA라는 의제를 빠뜨리고 갈 수가 없게 되었다.

  

  
8. 노무현 정부 평가를 마무리하며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좌파에서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규정하고, 우회전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평가는 잘못된 평가다. 이러한 평가는 우파 보수 세력이 노무현 정부를 ‘좌파 빨갱이’로 규정하고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평가하는 것만큼 잘못된 것이다. <노무현시대의 좌절>에서 노무현 정부의 주체역량이 미약해서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시대적 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구체적 실천의 방안과 정책패키지를 제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대적 과제, 역시도 매 시기마다 이동한다. 예를 들면, 노무현 정부의 1기 2년의 시대적 과제는 정치적 과제가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과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제왕적 시스템의 청산’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2기 후반기는 정치적 과제보다 경제적 과제가 우선이었다. ‘양극화 대처와 극복 방안 마련’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면 정부는 실패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시대적 과제를 정확하게 포착하지는 못해도 방향은 정확하게 봤다고 본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종합적 판단 능력이나 구체적 추진기획 능력에서 특별한 차이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과 철학, 가치관의 차이가 점점 크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다. 언제까지 낡은 진보의 틀로 진보개혁을 주장할 것인가? 구체적 정책대안으로 검증받아야 한다. 아무튼 노무현 정부는 우리에게 막연하게 포괄되었던 ‘진보개혁세력’과 그 ‘이념’을 혁신하고 재구성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면 노무현 정부는 정치적으로 실패했는가? 그렇다. 실패를 부정하기 어렵다. 유례없는 대통령 선거와 총선의 참패에서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찾을 수도 있다. 대통령 선거투표에서 지지율을 숫자로 확인하는 것만큼 명확하게 잘 보이는 것은 없다. 역설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87년 6월 항쟁에서 제기한 민주화의 완성을 스스로 실현함으로써 즉 노무현의 당선 그자체가 민주화의 성취였으므로 민주화의 과제는 ‘자동 해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민주세력이라고 통칭되는 모든 후보의 합 28%에 불과했다. 국민들에게는 민주화의 과제가 더욱 절박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았다. 이제 실패에서 진짜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어째든 현재는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정치세력과 노무현 정부를 구성했던 주도세력은 완전히 해산되어버리고 공중에 분해된 체로 있다는 점에서 노무현 정부는 실패했다. 새로운 진보정치세력으로 다시 모이려면, 시대정신, 시대적 과제를 분명하게 하고, 그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정책적 대안의 구체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노무현 정부 평가가 중요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