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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영화만드는 감독

강산21 2006. 9. 16. 17:53

찰리 채플린을 꿈꾸는 사나이 청각장애인 영화감독 박재현

소리가 없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 아직 감독이라는 호칭에도 쑥스러워하는 청년 박재현이 그리는 편견 없는 세상. 그것은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메시지가 담긴 그의 흑백 영상 속에 깃들어 있다.

“농인 문화를 건청인 문화에 전도하는 영화감독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깊은 울림을 주는 ‘조용한’ 영화

청각 장애인 영화감독 박재현(25)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여러 순간 뜨끔했다. 그리고 취재기자의 무지와 무관심을 탓했다. 영화감독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의 감독 중에 누구를 좋아하느냐고 질문을 던졌고, 그가 좋아할 것 같아서 며칠 뒤에 있을 한국 영화의 기자시사회에 함께 가자고 권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아하는 감독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 영화를 한번 보세요, 자막이 있던가요? 자막이 없으니(청각 장애인들은) 영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화제인데 볼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한국 영화에 자막을 의무화했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틀림없이 존경하는 감독이 많이 생기겠지요.”

그와의 인터뷰는 노트북과 필담, 인스턴트 메신저 그리고 이메일을 통해 이뤄졌다. 이렇게 소통 수단이 다양하지만, 정작 그는 영화 한 편이 주는 재미를 오롯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박재현은 청각 장애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그들을 위한 맞춤용 영화를 만들었다. 소리 없는 흑백 영상의 단편 영화들은 농인뿐만 아니라 건청인(그는 청각 장애인은 농인, 비청각 장애인은 건청인이라 칭했다)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지난 4월 장애인 인권 영화제 수상작인 ‘어느 애비의 삶’을 비롯해 그는 지금까지 총 6편의 단편영화를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다. ‘어느 애비의 삶’은 한 장애인 가장의 죽음이라는 실화를 다뤘고, ‘소리 없는 절규’는 단역배우로 드라마 촬영장에 갔다가 청각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쫓겨난 자신의 경험을 담았다.

“처음에는 오로지 수화가 들어간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심산에서 시작했어요. 이 사회에서 농인이 받는 차별을 주제로 하려다 보니 굳이 소리가 필요 없어서 그 부분을 배제하고 영화제에 출품했는데, 오히려 그것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거 같아요. 수화를 전혀 모르는 건청인들도 관심을 갖고 봐줘서 기뻤습니다.”

익살스럽고 상상력이 풍부한 마임과 연기를 통해 세계에 웃음을 선사한 찰리 채플린을 존경한다는 박재현은 그의 작품에서 흑백(黑白)과 무성(無聲)이라는 모티브를 따왔다. 이어 그가 언급한 영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로 기록된 ‘아리랑’. 전문 지식이나 기술의 뒷받침 없이 어렵게 무성영화를 만들던 그 시대가 바로 지금 소리 없는 영화를 만드는 그의 시대와 다름없다고 말이다.

그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캠코더를 접하고 영상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단편영화 제작용 캠코더를 구입해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나섰다. 그러던 중 농인의 목소리를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영상으로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영상 제작 집단 ‘데프 미디어’를 결성했고, 현재는 올가을 부산 국제 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 ‘소리 없는 절규’의 감독판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서울극장에서 농인 영화가 상영되는 그날까지

“영화 촬영 현장은 건청인들의 그것과는 달리 아주 조용한 분위기입니다. 소리 없이 수화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참 묘한 분위기죠. 농인을 비롯한 장애인들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장애인 독립영화제의 예산 지원이 활성화되면 좋겠습니다.”

그의 영화는 마침 서울 종로 3가에 문을 연 수화사랑카페의 김현호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정식 상영회를 열 수 있었다. 반응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모자란 점만 보였고, 그는 결국 체계적인 이론 공부를 위해 2주 전부터 장애인 방송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



박재현은 세 살 무렵 앓은 중이염의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한국구화학교에 다녔지만 건청인들과의 통합 교육이 좋다는 주변 분위기로 인해 고등학교는 일반 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수화통역이 지원되지 않았기에 수업 내용의 태반을 알아듣지 못했고 교우 관계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학교 때 엎드려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며 자세를 취해 보였다. 농담인 듯 웃음을 짓고 있지만, 씁쓸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제가 건청인과 농인 사이에 서서 양쪽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접하게 해주었어요. 수화도 언어라는 인식, 그리고 자부심도 덤으로 얻을 수 있었죠.”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그는 기자와 자신이 다른 문화에 살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가 종이에 커다랗게 썼다. ‘음성언어문화(소리)와 시각언어문화(수화)’. 이 두 문화의 다리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수화통역사’란다. 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수화통역사가 지원되지 않아서 꿈을 접었다.

가을학기에는 한국재활복지대학 수화통역과에 복학한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다리가 되기 위함이다.

“정부에서 책정한 장애인 예산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이 뭔지 아세요? 바로 휠체어예요. 농아인들은 불편할 게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예산 지원이 거의 되지 않고 있어요. 외형상 정상인처럼 보이기 때문에 정보 접근이 약해서 사회로부터 격리된 느낌을 갖고 살죠. 이 모든 문제를 영화를 통해서 알리고 싶어요. 영화만이 길을 열어줄 빠른 수단이라고 믿거든요.”

서울 종각에서 시작된 인터뷰의 여정은 청계천을 지나 수화사랑카페가 있는 종로 3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카페가 여름휴가 기간 중 문을 닫아 근처 서울극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더위를 피해 에어컨 찾기에 급급한 기자와는 달리 박재현은 영화 브로셔를 모아 차근히 읽어 내려갔다.

“언젠가 서울극장에 농아인들이 만들어낸 농인 영화 포스터를 붙이고 싶어요. 아까 제 꿈을 물으셨죠? 이게 제 꿈이에요. 5년, 아니면 10년?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좋은 작품은 쉽게 나오지 않잖아요(웃음).”

일주일 뒤 박재현은 이메일을 통해 8월 21일부터 9월 14일까지 26일간 서울 종로구 관수동에 자리한 수화사랑카페(www.suhwasarang.net/02-2274-2004)에서 농인 영화를 상영한다고 알려주었다. 눈에 띄지 않는다고 모르고 지나칠 것인가, 더불어 사는 삶의 풍요로움을 느낄 것인가. 순간에 이뤄진 아름다운 선택은 아주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박원태
 
[ 기사제공 ]  레이디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