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강금실-오세훈 포토 스토리

강산21 2006. 5. 16. 19:34
강금실 - 오세훈 후보 포토 스토리
[중앙일보 2006-05-16 07:24]    

[중앙일보 강주안.남궁욱] 강금실 후보는

열린우리당 강금실(49) 서울시장 후보의 지인들은 그를 가리켜 "통 크고 포용력 있는 여자"라 입을 모은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강 후보와 주변 사람은 그 같은 성품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한다.

 

◆ 불심 깊었던 어머니=강 후보의 어머니는 불심이 깊었다. 돌아가시기 전 경기도 가평에 절을 지어 조계종에 보시할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에 대해 강 후보가 법무부 장관 물망에 오르던 때부터 '무속인이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강 후보의 고교.대학 동창인 한국무용가 김경란씨는 "모르는 사람들이 떠드는 얘기"라 일축했다. 김씨는 "금실이 어머니는 불심과 영성(靈性)이 강했고 독학으로 득도에 가까운 경지에 올랐던 분"이라고 말했다.

 

강 후보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홍난파 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한 적이 있는 음악교사였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미국에 사는 큰 오빠는 1970년대 당시 드문 남성 재즈 뮤지션으로 악기에 능했다. 둘째오빠는 약대를 졸업한 뒤 약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 김경란씨는 "금실이의 가족 성향은 '반골성' '예술성' '종교성(영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빵재비'들 집회장 된 결혼식=강 후보의 전 남편 김태경씨는 유명한 운동권이었다. 둘의 사랑은 김씨가 운영하던 서점 민중문화사에 강 후보가 드나들면서 싹텄다. 84년 치러진 결혼식은 운동권 빵재비(옥고를 치른 사람)들의 집회를 방불케 했다. 운동권의 대부격인 고 김진균 교수가 주례를 섰고, 탈춤반 동료 커플이 쌍학춤을 췄다. 강 후보는 웨딩드레스 대신 흰 한복을 입었고 김씨는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결혼한 뒤 그들의 신혼집은 운동권 후배들의 아지트였다. 김씨의 운동권 후배인 영화감독 여균동씨는 "후배들이 숙식을 해결하고 집을 더럽혀도 강 후보는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출판사를 하던 김씨의 빚 문제 등으로 둘은 이혼했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낸다.

 

◆ 법조 '큰언니'=참여정부 출범 당시 국민참여수석(이후 참여혁신수석)을 지낸 박주현 변호사는 강 후보의 대학 6년 후배다. 그는 85년 고시에 붙은 뒤 판사이던 강 후보를 찾아가 "여성학 공부를 하자"고 했다. 강 후보가 커리큘럼을 짰고, 박 변호사와 후배 두 명이 합세해 1년간 강 후보 집에서 공부했다.

 

전 남편의 빚에 떠밀려 96년 변호사로 나선 강 후보는 민변에 가입했다. 그는 386 출신 변호사들의 큰누나 역할을 했다. 갚아야 할 빚이 많았지만 술값을 다른 이에게 미루지 않았고 노래방에선 늘 먼저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 한쪽만 고집 않는 포용성=집안은 불교 내력이지만 강 후보는 법무장관이 된 뒤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대모는 춘천지방법원장을 지낸 이영애 변호사다. 이 변호사의 남편은 15대 신한국당 의원을 지낸 김찬진 변호사. 강 후보와는 '코드'가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강 후보는 이 변호사에게 영세 문제를 의논했고, 법무장관이 된 뒤에도 이 변호사가 주관하는 여성 법조인 모임에 빠지지 않았다. 모임을 함께했던 판사 출신의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보수적 성향의 사람이 많은 자리였지만 강 후보는 늘 얘기를 경청했다"고 말했다.

 

강 후보가 법무장관일 때 검찰국에 근무했던 한 검찰간부는 "강 전 장관은 국가보안법 철폐론자였지만 존치를 주장하는 공안검사들을 이해해 주는 쪽이었다"고 기억했다.

이가영 기자 ideal@joongang.co.kr

 

오세훈 후보는

한나라당 오세훈(45) 서울시장 후보는 '강남' 이미지다. 깔끔하고 잘생긴 용모에 변호사라는 직업, 부드러운 말투까지 영락없는 '웰빙' 분위기다. 그에 대한 공격은 여기에 집중된다. 경쟁 후보 진영의 파상 공세에 시달린 탓인지 오 후보는 15일 작심한 듯 어린 시절의 고달픈 기억들을 끄집어 냈다.


◆ 판자촌 전전=1961년 서울 뚝섬에서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오 후보는 빈촌을 전전했다. 아버지가 다니던 건설회사는 경영난으로 월급이 잘 안 나왔다. 오 후보는 삼양동 달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 가장 고달팠다고 회상한다. "전기가 안 들어와 밤에는 책을 못 봤어요."

부친이 부산시 광복동에 근무하던 3~5학년 시절엔 사무실 한쪽을 나무 판자로 막고 살았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중2 때 어머니가 남대문시장에 수예품점을 내면서다. "살림은 나아졌지만 비좁고 침침한 가게에 어머님이 앉아 계신 모습이 마음 아팠지요."

오 후보의 핵심 공약은 '도심 상권 부활'이다. 그는 시장 상인의 역할이 대단하다고 믿는다.

 

◆ "정치인 될 줄 상상 못해"=오 후보의 동창들은 그를 '조용하고 착했던 모범생'으로 기억한다. 친구들은 "세훈이가 법조인은 몰라도 정치인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결혼 스토리가 눈에 띈다. 그는 동갑인 부인 송현옥(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씨를 고2 때 처음 만났다. 현옥씨는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준공탑을 준비하다가 요절한 조각가 송영수 전 서울대 교수의 딸이다. 현옥씨의 오빠인 상호(경희대 교수)씨가 몸이 아파 학교를 1년 쉰 뒤 오 후보와 같은 반이 되면서 세 사람은 함께 과외를 하게 됐다. 난생 처음 과외를 하게 된 오 후보는 10분이라도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과외가 새삼스럽지 않던 현옥씨는 '농땡이'였다. 과외는 깨졌다.

 

두 사람은 고3 때 입시학원에서 다시 만났다. 오 후보가 길에서 자판기 땅콩을 사주며 "너 고등학생의 몇 %가 담배 피우는 줄 아니◆ "라며 실없이 묻는 모습에 1년 전 '꽁생원'과는 다른 면모를 봤다고 현옥씨는 회상한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고려대 문과대에 응시했지만 오 후보만 낙방했다. 후기인 한국외대에 입학했던 오 후보는 2학년 때 고려대 법대에 편입, 영문과에 다니던 현옥씨와 소문난 캠퍼스 커플이 됐다. 현옥씨 어머니는 오 후보가 외아들에 동갑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딸에게 쏟은 5년간의 정성에 마음을 열었다. 둘은 오 후보가 사법시험에 붙은 직후인 85년 결혼했다.

 

◆ "오세훈 법에 안 걸릴 것"=사법연수원 기말시험 날 세균성 장염에 걸려 낙제하는 바람에 남들보다 1년 더 다니는 곡절 끝에 수료한 오 후보는 군 복무를 마치고 91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94년 대기업을 상대로 한 아파트 일조권 소송을 이겨 스타가 된 뒤 방송 진행자 등을 거쳐 2000년 총선 때 국회의원(서울 강남을)이 된 오 후보는 유독 후원회 운영을 힘들어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이런 풍토에선 좋은 사람들이 정치계에 남아 있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치자금을 옥죄는 '오세훈 법'을 만들고 17대 총선에 불출마했다. 그 자신이 지금 그 법에 옥죔을 당하고 있다.

 

"우리 선거 캠프는 철저한 자원봉사입니다. 옛날 선거판을 생각하고 왔다가 돌아간 사람도 많아요. '오세훈 법'이라고 만들어 놓고 오세훈이 걸리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강주안.남궁욱 기자 jooan@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