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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운동과 헤롯왕의 두려움

강산21 2009. 7. 25. 21:23

[설교] 예수 운동과 헤롯왕의 두려움
-조헌정 목사, 6월 8일 한신대 촛불 예배 설교문
입력 : 2009년 06월 09일 (화) 22:24:31 [조회수 : 1669] 조헌정

“분봉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여 하니 이는 혹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혹은 옛 선지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헤롯이 가로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고 하며 저를 보고자 하더라.” (누가복음 9장 7-9절)

오늘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 촛불예배로 대한문 앞 거리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 거리예배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민중들과 함께 하셨던 현장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에 너무 익숙해 있고 그래서 그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래 이렇게 거리에서 드리는 예배는 특별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어보면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숙청하시고 성전을 허물라는 과격한 발언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장소에 관계없이 신령과 진심으로 행하는 예배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는 어떤 예전과 형식을 갖춘 예배라기보다는 가난한 민중,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현장의 예배를 중요시하셨습니다. 그래 오늘 우리가 이렇게 거리에서 드리는 예배는 특별한 예배가 아니라, 가장 복음적이고 가장 성서적인 예배입니다.

부자와 강자 편에서 귀 막은 MB정권

우리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작년 초부터 매우 숨 가쁘게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는 아홉 번의 아파트 투기를 위한 위장전입과 BBK 거짓과 유령회사 설립을 통한 자녀의 위장취업과 세금 포탈이라는 전과 14범의 범죄행위에도 ‘잃어버린 10년’을 운운하며 ‘국민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꼬임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간 건설회사 CEO 출신임을 자랑하며 대한민국을 ‘대한주식회사’로 바꾸기 위해 혈안이 되어왔습니다. 실제로 그는 부시 대통령 시절 아주 가까운 사람만이 머무는 데이비드 캠프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쇠고기 전면수입을 허용하는 서류에 서명하였고 미국 비지네스인들의 모임에서 자신을 가리켜 ‘I'm CEO of Korea Incorporation’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그 동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얼굴이 뜨거워졌는지 모릅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5천 년 역사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 아닌 돈벌이에 환장한 한 회사원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후 고소영 강부자로 대변되는 ‘비지네스 프렌들리’ 친재벌 정책은 다세대 주택소유자의 세금을 깎더니 급기야 올해에는 얼마 되지도 않은 저소득층 곧 빈곤층의 임금을 깎겠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장로라고 하는데, 그 사람이 가진 성경에는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그가 가진 성경에는 예수는 예루살렘의 호화주택에 살면서 로마에 아부하고 부자들하고 친하게 지낸 얘기로 가득 채워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위기를 느낀 많은 시민에 의해 2개월 이상 촛불이 타올랐습니다. 수십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던 그날 그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만, 그것 또한 거짓이자 속임수였습니다. 회개는커녕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이 정권은 지난 1년 동안 광폭한 정치를 계속하여 오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당한 표현을 강압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촛불 참여자의 무차별 검거, 미르네바사건, 구글 Korea입니다. 말은 인터넷강국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인터넷을 탄압하는 대표적인 국가입니다. KBS, MBC, YTN 주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는 악화할 대로 악화하였습니다. 결국 비열한 공안 속임 정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난주부터 현실 정치와는 무관한 여러 대학의 교수들이 연이어 성명서를 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서울대 교수 124명이 시국선언문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권의 반응은 서울대 교수가 1,700명이나 된다고 하며 이를 숫자에 근거하여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나 본대에 앞선 첨병은 많은 숫자로 말하여 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언자적 소리를 내는 종교인들이나 이 사회를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는 교수들은 이 사회의 파수꾼들이자 첨병입니다. 이들은 민감한 사회인식을 가진 사람들로서 마치 지하 깊숙이 자리 잡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처럼,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산소부족을 제일 먼저 느끼고 비상벨을 누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비상벨을 누르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노무현의 정신이 사람들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저는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로 시작하여 올곧은 정치활동을 하던 20여 년 동안 고국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고국에 돌아왔고 국정 초기 대통령 후보시절의 주장과는 달리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아 배신감을 느꼈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협정에 있어 의견을 달리함으로 사실 찬성 쪽보다는 반대 쪽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물론 그의 탈권위적인 행동에 놀라기도 하고 친서민적인 개혁정치에 박수를 쳤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죽음을 통해 그의 삶과 행동들이 다시금 재조명을 받으면서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그는 역대의 어느 유명한 정치인에 못지않은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사실입니다. 퇴임 후에도 백성이 주인 되는 진보정치를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며 책을 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존경의 대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견딜 수 없는 참극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표현을 쓰자면 오늘 루가복음 말씀에서 세례요한의 죽음이 예수님을 비롯한 여러 제자에게 나타났듯이 노무현의 정신이 사람들 속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글 가운데 감명 깊게 읽은 추모의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노무현과 그의 시대를 보내며] (정지창/ 영남대 독문과 교수)

노무현의 죽음은 역사에 등장하는 숭고하고 비장한 영웅들의 죽음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는 고전비극의 주인공처럼 왕이나 장군, 귀족도 아니고 반인반신의 용사도 아니었다. 강철같은 의지를 가진 혁명가나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지도자, 신출귀몰한 책략가도 아니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으나,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고집 때문에, 인권 변호사로, 바보 정치인으로, 대중의 자발적 지지에 의해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다시 농민으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절벽에서 몸을 던진 어수룩한 촌놈일 뿐이다.

우리는 뒤늦게서야 그의 비극적인 추락이 4·19와 5·18, 6·10으로 얻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과에 안주했던 우리 모두의 탐욕과 나태와 위선의 결과임을 깨닫는다. 한때 그에게 열광하고 박수를 보내던 서민 대중은 주식과 대운하, 뉴타운으로 떼돈을 벌어볼 욕심에, 이른바 386세대의 중산층은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어 출세시키기 위해, 등을 돌렸다. 민주시민과 노동자, 지식인들은 반대세력을 모질게 짓밟지 못하는 촌놈 노무현의 무력함과, 속내를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는 투박한 언행을 나무라며 현실정치를 외면하고 한탄만 하다가, 허황한 경제살리기 747 공약을 내세운 수구 기득권 세력에게 민주주의를 헌납하고 말았다.

노무현의 죽음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야만성을 증명한다. 온갖 풍파에도 끄떡없이 버텨온 세련되고 영악한 기득권세력은 재산도 학벌도 없는 시골 출신 대통령의 우직한 정의감을 비웃고 왕따시키는 데서 끝내지 않고, 그가 낙향한 고향 마을까지 따라와 처자식과 친구, 후배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끝장을 볼 때까지 괴롭혔다. 물고 뜯고 짓밟고 조롱했다.

약삭빠른 수구 족벌신문과 방송은 권력에 빌붙어 알량한 잇속을 챙기려고 온갖 거짓말과 욕지거리를 끝없이 쏟아냈다. 심지어는 소박한 촌집이 ‘아방궁’으로 왜곡되고, 봉하마을을 찾는 버스에 30만 원씩 돈을 준다는 헛소문까지 나돌았다. (나는 1980년대에 전라도 주유소에서는 ‘김대중 선생 만세’를 외치치 않으면 기름을 팔지 않는다는 유언비어를 대학 교수휴게실에서 들은 적이 있다.) 줄을 풀어준 너그러운 주인한테 버릇없이 대들던 검찰과 경찰은 강퍅한 새 주인이 ‘물어라. 쉭’ 하고 줄을 당기자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전 주인이건 누구건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물어뜯었다. 정적을 역적이라고 모함하여 유배를 보내고 후환을 없애려고 3족을 멸하여 씨를 말리던 왕조시대의 잔혹한 정치보복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 기막힌 퇴행과 모욕에 맞서 힘없는 농민 노무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생 추구해왔던 가치를 온몸을 내던져 지켜내는 투신뿐이었으리라.

잘 가시오, 벗이여!
야만의 시대에 우리는 고통을 견디고 치욕을 감수하며 ‘살아남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추구했던 노무현은 너무도 우직한 촌놈이었기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삶과 죽음이 한 조각인 자연”으로 돌아갔다.

1946년 병술생 개띠. 그가 기득권세력의 사냥개들에 쫓겨 헐떡거리며 살았던 개 같은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다. 탐욕으로 파헤쳐지고 남북분단과 지역주의로 갈갈이 찢긴 산하를 장엄하고 처절한 낙조로 물들이며.

잘 가시오, 벗이여! 같이 태어나 같은 길을 걷다가 먼저 간 동갑내기 도반들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본다. 화가 오윤, 시인 김남주, 음악가 문호근, 변호사 조영래 그리고 바보 촌놈 대통령 노무현!


다음은 프랑스 리옹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박사 과정 중에 있는 이찬웅 씨 글의 일부입니다.

그가 죽음을 선택했던 방식을 두고 모욕을 시도하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답하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생물학적인 생명을 소멸시키면서 우리의 정치적 이념을 보존하고 작동시키길 원했다. 그가 대립시킨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우리 공동의 삶이다. 정치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고, 그래서 혐오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그는 정치라는 단어를 그 모든 오염에서 거의 유일하게 구해냈다. 이렇게 순수해진 바로 그 의미에서 그는 위대한 정치가가 되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정치인도 한반도의 땅과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토록 강렬하게 뒤흔들지 못했다.

<한겨레21>이 작가와 시인 10명에게 노무현을 위한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그중 두 개를 소개합니다.

도종환 시인이 쓴 비명입니다.

치열하게 살았으나 욕되게 살 수는 없어 허공에 한 생애를 던진 노무현의 영혼을 하늘이여. 당신의 두 팔로 받아 안아주소서.

소설가 김연수 씨이 쓴 비명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을 대신해 번쩍 치켜들었던 당신의 오른손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패배한 자들을 위해, 또 그들과 함께. 그게 지는 길일지라도 원칙과 상식의 길이라면 두려움과 불이익을 마다하지 않았던 당신의 삶에게. 또 사랑과 행복의 기억이 공포와 폭력의 기억보다 더 오래간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당신의 삶에게, 또한 지는 길처럼 보이는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진리를 가르쳐준 당신의 죽음에게.

슬프고 억울한 현실

노무현 대통령의 휘호 가운데 ‘강물처럼’이라는 짧은 글귀가 있습니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물처럼!” 그가 말하는 바다 그가 꿈꾸었던 바다의 세계는 어떤 세계였을까요? 그 세계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평등의 바다를 말하였을 것입니다. 강물처럼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이었을까요? 그건 돈과 권력과 학력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만이 판을 치는 그런 사회가 아닌 능력이 가진 사람들이 그 능력을 펴고 꿈을 가진 사람들이 그 꿈을 펴는 그런 자유로운 세상의 강물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돈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강물의 줄기를 막아 운하를 만들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한주식회사로 낙하시키고 모든 국민을 돼지 떼로 만들고자 하는 정권과 이를 부추기는 보수언론과 토건재벌세력이 있습니다.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얘기를 입증하기나 하듯이 우리는 그의 국장이 거행되던 그날 대법원이 상식과 원칙을 무시한 불법승계를 인정함으로 삼성재벌 앞에 무릎을 꿇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상장이든 비상장이든 삼성의 에버랜드 사건은 계열사 간 순환출자의 반시장적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부모와 자식 간에 이루어진 내부자 거래로서 초저가의 전환사채 발행을 통해 경영권 승계를 한 불법적 탈세 행위입니다. 삼척동자라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원칙을 어긋난 비상식적인 법적 논리를 내세우며 이를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어찌 우리는 이제 민주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법원마저 신뢰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억울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외쳐야 할 예수의 복음

우리는 마가복음 1장 첫머리에서 예수께서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세상에 나오셨다는 기록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무엇 때문에 옥에 갇혔습니까?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가진 것들을 나누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통치자 헤롯왕의 부정을 정면으로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는 옥에 갇혔고, 옥에 갇혀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자 끝내 목이 잘렸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권력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소리가 칼에 의해 멈추자, 약자와 가난한 자를 보호하는 소리가 사라지자 이를 대신해서 세상에 나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로서 소리를 외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외치신 첫 번째 복음의 소리는 크게 4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가난한 자에게는 무엇이 복음입니까? 밥입니다.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임금입니다. 그것은 누진세와 같은 사회 개혁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눈 먼 자에게 눈 뜸을> 이것이 단순히 육체적 질병만을 의미한 것이겠습니까? 육신의 병은 그 종류만도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눈뜸이란 단순히 육신의 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언론자유를 말합니다. 숨겨진 것들이 드러나 보지 못하던 사람들이 진실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포로 된 자들에게 해방을>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의를 외치고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외치던 많은 사람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죄명으로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려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면 당연히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셨을 것입니다.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지금 용산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해 살해당한 5명의 시신이 넉 달이 넘어가도록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면 이명박 정권이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을 범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이처럼 가난한 자와 포로가 된 자와 눈먼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저는 이 점에서 기장과 한신이 다시금 예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장과 한신은 성서의 진리가 전통과 교리 수호하는 이름으로 왜곡될 때, 성서의 참 소리를 지켜내기 위해 시작하였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의 교권적인 영향력을 배제하고 민족 자주의 정신을 지켜 내기 위해 시작하였습니다. 그래 기장과 한신이 지켜야 할 생명은 이 사회를 향한 예언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죽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저 하늘나라의 피안의 구원이 아닌 이 땅에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는 ‘MIssio Dei’의 구원을 외쳤습니다.

우리 기장과 한신은 다른 교단이 어떠하든 좁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역사는 지금까지 진리의 길과 생명의 길은 좁고 험한 길이었음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우리 기장과 한신이 넓은 길의 유혹에 빠진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교가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로마 권력에 아부하고 부자와 하나 되어 빈익빈 부익부의 기존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가는 잘못을 범할 때에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 누가복음 9장에서 헤롯왕은 예수의 제자들이 이 마을 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당황합니다. 병이 났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해서 오늘의 통치자들이 당황하거나 두려워할까요? 별로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일종의 주술적 사건이요 종교적 사건이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백성이 병 고침을 받으면 더 좋아해야 할 헤롯왕이 당황하고 두려워할까요? 그건 병 고침이 단순히 육신의 병 고침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일종의 민중의 주체의식의 깨어남에 대한 상징적인 종교언어코드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는 지배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꿈꿨던 진보정치 그것은 곧 민중이 깨어나는,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였음을 생각할 때, 그의 죽음의 의미가 다시금 새롭게 다가옵니다.

기장, 한신! 다시 좁은 길로!

사랑하는 한신 신학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예수 복음 운동의 정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당시로써는 로마의 폭력과 강압으로 말미암아 감출 수밖에 없었던 예수 운동의 정치적 해방성과 갈릴리 민중성을 오늘의 시대에 밝히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의 나사렛 희년정신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의 길을 따라 이곳 대한문에 섰습니다. 역사의 바른 증언자가 되기를 다짐하여 이곳에 섰습니다. 우리의 앞서갔던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따라 이곳에 섰습니다.
사랑하는 한신 신학도 여러분!

우리 모두 김재준 목사님을 쫓아 진리의 길에 서십시다!
장준하 선생님을 쫓아 정의의 길에 서십시다!
문익환 목사님을 쫓아 평화통일의 길에 서십시다!

지난 토요일 저녁 범민련 초대의장을 지내시고 평생을 민주와 통일운동에 헌신하신 89세의 강희남 목사님께서 자결하셨습니다. 그래 영결식이 수요일 오후 저희 교회에서 있는데, 자살한 목사를 위해 어떻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느냐고 저희에게 항의하는 소리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은 하나님의 것으로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차스런 상황에서 단지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죽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으셨습니다. 이웃과 사회의 구원을 위해, 민족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죽는 죽음은 거룩한 죽음입니다. 구한말의 민영환 선생, 이준 열사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의 죽음과 전태일열사를 비롯한 민주항쟁의 여러 분신자들을 단지 자살이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이분들의 죽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값지고 거룩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와 개혁의 뜻이 여러분이 앞으로 걸어갈 목회 여정에 접목되는 이 저녁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