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마우스탱크’ 전락한 ‘싱크탱크’들

강산21 2009. 2. 5. 15:10

“이제 그런 보고서 안쓴다, 무서워서 못써”
‘마우스탱크’ 전락한 ‘싱크탱크’들
정부입장과 배치되거나 비관적 의견에 압력
쓴소리하면 용역일감 못받고 인사상 불이익
국책연구소는 물론 민간연·금융사까지 ‘통제’
한겨레  안선희 기자  김경락 기자 정남구 기자
“다시 그 문제에 관한 보고서는 쓰지 않을 거다. 무서워서 못 쓴다!”

민간 금융회사 연구원인 김철수(가명)씨는 지난해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직후 한 민감한 경제이슈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가 사장에게 불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 정부 쪽에서 이 보고서 내용을 두고 크게 분개했고, 사장에게 전화를 해 ‘경고’를 한 것이다. 김씨는 “그때 만약 내 말이 맞다고 버텼으면 정말 잘렸을 것”이라며 “다시 한번 그런 식으로 썼다가는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정부는 연구원을 싱크탱크(두뇌)가 아니라 마우스탱크(입)로 바라본다”는 이동걸 전 금융연구원장의 29일 이임사를 계기로, 정부의 ‘연구기관 통제’ 실상이 물위로 떠오르고 있다. 관련 연구기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두뇌집단에 대해 정권의 ‘입’(홍보수단) 노릇을 요구하는 정부의 압력은 국책 연구소에 그치지 않고 민간 연구소, 금융회사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새 정부 들어 원장이 바뀐 조세연구원은 지난해 3월과 6월 ‘유령 보고서’ 두 가지를 냈다. 새 정부가 추진하는 법인세 인하가 투자 활성화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이는 그동안 조세연구원의 연구결과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정부는 조세연구원에 용역을 줘 이들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뒤, 보고서 전문은 공개하지 않은 채 결론만 정책 홍보에 이용했다.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국책 연구소에는 용역과제 등의 일감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비판적 시각을 가진 연구원은 징계·감봉 등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정부 쪽에 ‘찍힌’ 한 국책 연구소 연구원은 “그동안 발언과 언론 기고 등을 문제 삼아 나는 감봉·정직이 거론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해고 위협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갈등은 기존 정부 때도 없지는 않았다. 차이점은 그 정도가 심하고, 범위가 민간 연구소와 기업으로까지 확대돼 있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우려가 고조됐던 지난해 말에는 금융연구원 쪽에 ‘외환위기는 없다’는 내용의 언론 기고를 하라는 요구가 내려오기도 했다.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경제위기가 심각해진 뒤에는 외환시장·성장률·경제전망 등과 관련해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삼성증권의 ‘성장률 해프닝’은 이런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지난해 11월 삼성증권은 국내 기관으로서는 최초로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마이너스(-0.2%)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곧 홈페이지에서 삭제됐다. 삼성증권은 지난 19일 보고서에서 성장률을 2.0%로 제시했다. 이런 ‘상향조정’은 최근 국내외 기관들이 하루가 다르게 전망치를 낮추고 있는 상황에서 이례적인 것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냐”고 말했다.

 

정부는 금융위기 이후 수차례 증권사 애널리스트과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소위 ‘시장과의 대화’로 포장됐지만 참석자들은 “위기의식을 조장하거나,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보고서를 쓰지 말라는 내용이 핵심이었다”고 전했다. 이후 애널리스트들은 언론과의 인터뷰 뒤 익명 요청이 잦아졌다. “보고서 행간을 읽어 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


정부의 이런 행태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정확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경실련은 이날 성명을 내 “이미 세계경제는 글로벌화돼 우리 내부에서만 입단속을 한다고 해서 정부 정책의 문제점이 가려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라며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 아니라, 정책의 적합성을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 이동걸 전 금융연구원장
이동걸 전 금융연구원장

“정부의 정책을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 연구원이나 연구원장은 현 정부의 입장에서는 아마 제거되어야 할 존재인 것 같습니다. 경제성장률 예측치마저도 정치 변수화한 이 마당에 그것은 아마 당연한 일이겠지요.”(이임사 가운데)

 

한 금융회사 연구원

“지난해 말 민감한 주제에 대해 보고서를 한번 썼는데 정부 쪽에서 크게 분개했다. 정부 관계자가 사장에게 전화를 했고, 사장이 세게 경고했다. 잘리는 줄 알았다. 내 말이 맞다고 버텼으면 정말 잘렸을 거다. 이제 그 주제에 대해서는 보고서 안 쓴다. 무서워서 못 쓴다. 다시 한번 쓰면 난 구제받지 못할 거다. 소위 ‘전문가’로서 부끄럽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연구원

“성장률이나 쟁점사항들에 대해 (정부와 입장이 다른) 보고서를 내면 정부 쪽에서 전화가 온다. 참여정부 때도 정부 눈치를 아주 안 볼 수는 없었지만, 그때는 전화가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 국책연구원 연구원

“(새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발언을 계속했더니) 일감을 주지 않는다.”

 

한 금융회사 연구원

“정부에서 비관적인 시각 나가는 것을 싫어한다. 시장에서 비관론자 몇 사람 안 된다. 자칫 내 신분이 노출될 수 있다. 완전한 익명으로 인용해 달라.”

안선희 김경락 정남구 기자 s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