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세상읽기] 무례하거나, 무지하거나 / 배병삼

강산21 2008. 10. 4. 14:27

[세상읽기] 무례하거나, 무지하거나 / 배병삼
세상읽기
한겨레

»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생각하면 ‘남을 위한다’는 것은 참 무례하고 오만한 말이다. 이 속에 상대방을 낮춰보는 눈길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른이요 상대는 어리다고 여길 때, 나는 부자지만 상대는 가난하다고 여길 때, 또는 나는 깨우쳤지만 상대는 무식하다고 볼 때라야 ‘남을 위하여’가 가능하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니 오만이요, 상대를 동의 없이 낮춰보니 무례한 것이다.

공자는 “밥 먹을 땐 밥만 먹고, 잘 때는 잠만 잤다”고 전한다. 먹고 자는 것도 내 몸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집중했다는 뜻이다. 나 자신조차 위하지 않은 터에, 남을 위할 겨를인들 있으랴. 인(仁)이니 덕(德)이니 하는 말도 남을 위하라는 게 아니라 본래의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걸 두고 붙인 말일 뿐이다. 외려 위한다는 생각이 끼이는 순간 인이나 덕은 사라지고 만다.

 

‘백성을 위한다’라는 뜻인 위민(爲民)은 더욱 그러하다. 맹자의 생각을 위민사상이라고들 하는데, 이건 잘못된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백성을 위하여’라는 말을 쓴 적이 없을 뿐더러 군주들에게 위민정치를 권한 적도 없다. 다만 제 직분(군주 직)에 충실하기를 요구했을 따름이다. 맹자가 혁명을 당연시한 까닭은 군주를 천하의 소유자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주인이 아닌 자가 감히 누구를 위한단 말인가!) 도리어 위민정치를 반대한 이가 맹자였다.

 

이 정부 들어 청와대 부속건물들 명칭을 ‘위민’으로 바꿨다고 한다. 지난 정부에서 ‘여민관’이던 것을 위민1관, 위민2관 하는 식으로 바꿨고, 또 방문객 대기실도 ‘위민센터’로 바꿀 작정이라고 한다. 여민(與民)이란 것은 ‘백성과 함께한다’는 뜻으로, 이것은 도리어 족보가 있는 말이다. ‘여민동락’이라는 널리 알려진 표현 속에 특별히 맹자의 정치생각이 잘 들어있다.

 

위민과 여민은 비슷한듯 하나 결단코 다른 말이다. 여민은 ‘국민과 함께 정치를 행한다’는 뜻이니 분리된 너와 나가 ‘우리’가 되어 함께하자는 민주적 방향성이 스며들어 있다. 반면 위민은 ‘국민을 위한다’는 말이므로, 위해주는 ‘나’와 위함을 받는 ‘너’로 나뉘면서 그 사이에 지배·복종의 권력관계가 개입된다.

 

그동안 위민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세종의 정치를 애민이라 부르고, 흉년에 백성 구제하는 것을 휼민 또는 위민이라 이름붙인 것이 그런 예다. 하나 이 말들은 나라의 주인이 군주라는 왕권중심 사상이 전제된 바탕 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임을 첫 머리에 명기한 것도 이런 소유의식의 반영이다. 그리고 이때의 위민은 미덕일 수 있다.

 

하나 오늘 이땅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이다. 이 정부와 공무원은 주인들이 내놓는 세금을 가지고 나라를 운영하도록 위탁받은 이들이다. 고용된 자들이 고용한 이들을 위한다고 한다면 이건 경위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어디 감히’라는 분노를 자극하기에 십상인 말이 위민이다.

 

말은 바로 해야 하고, 이름은 올바로 붙여야 한다. 정치의 출발이 이름은 바로잡고 말은 올바로 하는 데서부터 비롯하기 때문이다. 남을 위한다는 말조차 생각하면 부끄러운 터에, 민주주의를 내세운 나라에서 위민이라는 말은 알고서는 못쓸 말이다. 한데도 국민이 다 쳐다보는 청와대 건물들 이마에다 ‘너희를 위하겠다’는 이름을 붙였다니 도대체 오만한 건지, 무지한 건지 혀를 차게 되는 것이다. 모르고 썼다면 무지한 말이요, 알고 썼다면 오만한 말이 위민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한 말이 위민이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