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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상> 한계 부딪친 당원제도

강산21 2007. 9. 12. 12:58

[정당민주주의가 흔들린다] <상> 한계 부딪친 당원제도

열린우리, 실패한 혁명
 

대통합민주신당은 당원 투표가 아닌 국민경선으로 대통령 후보를 뽑는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후보 선출 방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여론조사 방식’으로 실시된 예비 경선(컷 오프)은 ‘유령선거’ 논란만 남겼다.

 

원내 최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을 승계한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이 원칙없이 치러지는 까닭은 후보가 난립했고, 당원들이 들러리로 전락했다는 데 있다. 특히 옛 열린우리당은 집권당으로는 처음으로 당비를 납부하는 기간당원이 후보 선출 등 당내 중요 의사결정권을 갖는 ‘당원 혁명’을 시도했었기 때문에 대통합민주신당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어느 기간당원의 회한

 

열린우리당 대의원들이 당 해체를 결의하던 지난달 18일. 꼬박꼬박 당비를 내며 기간당원으로 활동했던 김성현(42)씨는 눈물을 흘렸다. 정당을 통해 ‘생활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꿈이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경기도 광명에 있는 교회의 목사다.“목사들은 예전부터 정치에 관여를 많이 했어요.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여서 출마자들이 목사를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이죠.”김씨는 이런 음성적인 방식보다는 공개적인 참여를 택했다.“신도들과 지역 문제를 토론하고, 우리들의 정치적인 요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당이 필요했습니다. 상향식 민주주의를 표방한 열린우리당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기간당원제는 도입과 동시에 퇴색했다. 특히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광명시의 기간당원이 하루 밤새 500명씩 불어나는 기현상을 목격했다. 김씨는 “지방선거 후보들이 당비를 대납해 주면서 자기편 기간당원을 대거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기간당원제는 항상 권력투쟁의 원흉으로 꼽혔고, 아홉 차례의 당헌·당규 개정을 거치면서 계속 후퇴하다가 결국 폐기처분됐다.”면서 “기간당원들은 특정 후보의 지지자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당원 혁명’ 왜 실패했나

 

김씨의 말대로 창당 당시 ‘권리행사(전당대회) 2개월 전에 입당해 월 2000원 이상의 당비를 6개월 이상 납부한 자’로 정해졌던 기간당원제는 단 한 차례도 적용되지 못했다.

 

희망제작소 유시주 객원연구위원은 기간당원제 실패를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탓이라고 지적했다. 유 위원은 “차기 대권을 노리는 당의장들이 지지자들을 당원에 대거 포함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기간당원제를 흔들었다.”고 말했다. 공직후보 선출과 당내 요직 선출에서 기간당원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조직관리에 위기를 느낀 당의장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기간당원제 요건을 완화했다.‘선거꾼’ 활동에 익숙한 과거 당원들이 대거 들어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기간당원들과 ‘동원’된 당원들은 해당 지역에서 사사건건 충돌했다. 실제로 2006년 2·18 전당대회와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3개월새 기간당원이 30만명이나 늘어 ‘종이당원’,‘대납당원’ 논란이 일었다.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던 김희숙(36·여)씨는 “수평적인 정치 네트워크를 실현하기 위해 당 활동에 적극 나섰지만 결국 실패했다.”면서 “열린우리당이 총선 직전 급조됐고, 일거에 최대 의석을 차지해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소속의 임종인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는 노사모 회원들이 기간당원의 주축이었다.”면서 “특정 개인을 위한 계파 성격이 강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기간당원제 사수를 끝까지 주장했던 김두수(45) 전 중앙위원은 “유럽식 대중(계급)정당을 그대로 이식한 것이 근본적인 한계였다.”면서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고, 참여한 만큼 발언권이 주어지는 개방·참여·공유의 ‘웹2.0’식 정당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구 김민희기자 window2@seoul.co.kr

 

한나라, 당심의 분노

 

경남 합천에 사는 임충근(57)씨는 15년 전인 1992년 민자당에 입당했다. 돈을 받고 당에 가입하는 게 자연스럽던 그 시절, 임씨는 돈을 내고 당원이 됐다. 그만큼 김영삼 총재의 비전과 철학을 지지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다시 한나라당으로 바뀌는 동안 정당에 대한 임씨의 지지는 변함이 없었다. 매월 1만원씩 통장에서 당비가 빠져나갔지만 아깝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씨의 생각은 요즘 들어 바뀌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당에 반영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임씨는 “당 소식은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접한다. 옛날에는 가끔 중앙당에서 전화해서 내 의견을 묻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이렇듯 평당원의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은 130만 당원을 거느린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당원들은 대부분 충성도가 높고 오랫동안 당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은 더 큰 파급력을 갖는다. 인천 계양을 당원협의회 소속 당원인 이모(52)씨는 “옛날부터 당원은 선거 때 표를 모으는 수단이거나 당 행사에 동원되는 인력일 뿐이었다.”고 씁쓸해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한 당원도 “당이 좀더 민생정치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는데, 이런 의견을 당에 전달할 통로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대선 경선을 거치면서 일부 당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당심(黨心)보다 일반 국민 여론조사의 결과가 경선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판단에서다. 불만은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했던 당원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경선 불복 소송을 낸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대표인 정광용씨는 “선거법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경선을 여론조사로 대체할 수 있다고 했는데, 투표도 하고 여론조사도 하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시절부터 당원이었다는 김모(67)씨도 “당원 투표로도 충분한데 왜 여론조사까지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당 교육도 꼬박꼬박 받고 당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왜 당원의 의견을 무시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문가들은 한나라당이 이번 경선을 통해 드러난 평당원들의 불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강원택 숭실대 정치학과 교수는 “박사모와 같은 자발적인 지지자의 출현은 고무적인 현상”이라면서 “이들을 책임있는 당원으로 포섭해 자발적 참여자가 주인되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민노, 우물안 내분

 

국내 유일의 계급정당인 민주노동당은 2000년 창당 이후 줄곧 진성당원제를 유지하고 있다. 매월 당비 1만원(저소득층은 5000원)을 내는 진성당원만이 공직후보 선출권을 갖는다. 옛 열린우리당이 진성당원제와 유사한 기간당원제를 도입했고, 한나라당도 책임당원제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민노당 역시 이번 대선 후보 경선과정에서 당원의 역할을 두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진성당원제를 엄격하게 유지하다 보니 대중정당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주장과 당 정체성을 위해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다 결국 정파선거로 이어졌다. 진성당원제를 접점으로 해묵은 노선투쟁의 골이 더 깊어진 셈이다.

 

다수파인 자주파(NL)는 국민들에게도 경선 참여의 길을 열어 놓아야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다며 국민참여경선을 주장했다. 하지만 평등파(PD)의 반대로 무산됐다.NL은 권영길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정파적 투표를 감행했고, 노회찬 후보를 중심으로 한 PD는 이를 집요하게 비판하며 세를 규합해 나갔다.

 

인천시당 김응호 사무처장은 “지지자 획득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면서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외연확대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당 마포구위원회 정경섭 위원장은 “국민참여경선을 했다면 선거인단 모집에 당의 모든 정치활동이 매몰됐고,‘종이당원’ 논란도 불거졌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평당원인 백준(45)씨는 “국민참여경선을 무산시킨 PD, 정파선거를 한 NL 모두 비판받아야 한다.”면서 “지역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중앙당만 여전히 주도권 다툼에 사로잡힌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국민참여경선 논란과 정파선거는 극한 대립을 낳았다.”면서 “당 발전의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기사일자 : 2007-09-12    6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