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슬픔과 노여움>1화 해설 및 주요참고자료.

강산21 2007. 6. 5. 14:36

01 Theme From Schindler's List
 


1. <슬픔과 노여움>(가칭)에 대하여

이 작업은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을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곳으로 바꾸기 위해 처절하게 싸워온 이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한 것입니다. 글로써 정리하는 것보단 그림과 함께 하는 것이 보다 쉽고 재미있고, 강렬하게 기억되리라 여겼기에 이런 형식을 선택했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인물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자료의 취사선택과 보는 시각은 철저하게 저, 김반장의 관점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시사평론가 시절의 유시민의원이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완전히 객관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의 한국정치, 그리고 그 속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여러 시각들 중 저의 시각으로 본 한국정치와 인물들을 그리고 싶었으며, 저의 시각이 최소한 여기 계신 써프앙 여러분들의 시각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 #1. <한홍구와 유시민, 양치기 소년이 되다> 

 
1화 <프롤로그>의 기본 뼈대는 한홍구 교수가 한겨레21에 기고했던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라는 글입니다. 아래는 그 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벌써 25년 전의 일이라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광주 학살이 벌어지기 1주일 전쯤인 5월11일이나 12일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서울의 봄’ 당시의 복잡했던 정세를 여기서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해지니 간단히 넘어가기로 하자. 당시 서울대에서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기에 앞서 학내에서 농성 중이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주기를 고대하고 있던- 그래야 ‘혼란’이 조성되고 군이 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했기에- 군부에서는 학생들을 자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계엄군(10·26 사건 당시 선포된 계엄령은 당시에도 살아 있었다)이 먼저 학교로 쳐들어와 학생들을 잡아갈 거라는 흉흉한 소문도 많이 돌았다.”

“그날 서울대에서는 300∼400명의 학생들이 철야 농성을 하면서 학교를 지키고 있었는데, 밤 9시가 지나 학생회 사무실로 여러 곳에서 주로 기자라고 하면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밤 군이 출동한다는 긴박한 정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안사의 역정보였던 것 같다. 나는 그날 무슨 일 때문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생회 주변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다가 유시민군을 만났다. 그는 당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그날 당번이 되어 농성을 이끌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복학생 선배들도 4학년 선배들도 보이지 않았는지, 그는 군이 쳐들어온다는데 농성 중인 학생들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군이 쳐들어온다는 게 확실한 정보라면 1·2학년이 대부분인 농성 학생들을 빨리 해산시켜야지 별수 있겠는가? 힘든 결정이야 그의 몫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답했던 것 같다. 아무튼 유시민군은 해산 결정을 내렸고, 우리는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날 밤 늑대는 오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유시민군과 나는 다음날 아침 7시 조금 넘어 몇몇 친구, 선배들과 함께 학교에서 만났다. 민망하고 쪽려 그저 얼굴만 쳐다보며 웃기만 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날 아침 강의실마다 돌아다니며 양떼를 쫓아버린 전날 밤의 소동에 대해 사과와 해명을 하느라 혼이 났다.”』

3. #2. 서울역 대투쟁


이 씬의 내용은 2004년 탄핵과 1980년 5월 서울역투쟁에 관한 한겨레 독자의 글을 바탕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일부분을 발췌하겠습니다.

『“흔히 인생에 누구에게나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합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세 번의 기회에서 한 번이라도 잘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개인에게 삼세번, 세 번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현대사도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두 번의 기회는 있었습니다.”

“첫 번째 기회는 80년 서울의 봄이었습니다. 79년 박정희의 죽음에 이어 박정희의 양자로 자처한 전두환 일당이 12.12 쿠데타를 저지르고 정권찬탈을 손아귀에 쥐기 직전인 80년 5월, 서울역에는 수십만의 대학생과 시민이 군부의 탐욕을 저지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학생들은 서울 각 대학에서 교정을 출발하여 서울역에 집결하였습니다. 서울역 광장은 지금은 주차장과 여러 시설물로 축소되었지만 당시는 매우 넓었습니다. 광장은 수십만의 학생 시민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회현고가도로 위에서도 시민들이 차를 세우고 내려다보며 박수치는 모습에서 곧 닥칠 군부독재의 종말을 꿈꾸며 가슴 벅찼습니다. 전경과의 충돌이 시작되었고 시청 쪽으로 버스가 불타고 있었고 서대문 쪽 고가 아래에서는 전경과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 2년생이었습니다. 오전에 캠퍼스를 출발하기 직전 교문 앞 집회에서 어떤 학우가 앞에 나와서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나가면 피를 흘러야 할지 모른다, 제2의 4.19를 각오해야 한다, 그래도 나가겠는가, 깊이 생각하자고 물었습니다. 그때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래 나가자, 나가서 피 흘리자 라고 답하였습니다. 모두는 아니라 해도 많은 젊은 우리는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릴 각오를 하였습니다.”』

4. #3. 마이크로버스 안에서의 논쟁


서울역 회군을 둘러싸고 마이크로 버스 안에서 벌어진 논쟁입니다. 눈치 빠르신 분은 아시겠지만 논쟁하는 세 인물은 위에서부터 심재철, 유시민, 이해찬입니다. 심재철의원과 이해찬 총리는 좀 비슷한데 유시민 의원은 안습이군요 -_-;

이 부분은 MBC드라마 “제 5공화국”과 심재철의 홈페이지내용을 토대로 했습니다. 어쭙잖은 균형감각의 발로라고나 할까요. 책으로 출판하게 되면 좀 더 사실에 가깝게 접근해볼 생각입니다.

5. #4. 서울역 회군


이 부분은 #2에서 인용했던 한겨레 독자의 글을 다시 참고했습니다.

『“서울역 앞에 모인 학생 시민들은 제2의 4.19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갑자기 급전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역 광장에 버스 한대가 있었는데 지도부는 버스 위에서 연설하고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때 지도부 한 사람이 올라섰습니다. 저는 그 버스 바로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의 표정 하나까지 기억합니다. 올라선 그 학우는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누군지 아시죠, 저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입니다 라고 시작하였습니다. 이어서 효창운동장에 공수부대가 집결하였다고 어쩌고 하면서 내 결정을 따라라 하더니 교정으로 돌아감을 선언하였습니다. 바로 서울역 회군의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반발의 목소리가 드세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총학생 회장은 심재철이었습니다. 그는 MBC 기자로 있다가 광주청문회에 불러 나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패장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패장답게 한나라당에 투항하였고 지난 3.12일 국치일에 탄핵가결 한 표를 던졌습니다. 반면에 같은 서울역 앞에 있었던 당시의 유시민, 이해찬은 온몸을 던져 저항하였습니다.”

“첫 번째 기회는 5월의 봄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역 회군으로 기회를 스스로 내던져버렸습니다. 그것으로 끝장났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각오했던 제2의 4,19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그것을 심재철 비롯한 지도부는 두려웠겠지만, 곧바로 광주 5.17 선량한 시민들의 학살로 대신하였습니다. 내부역량의 부족, 역사와 상황인식의 안이함 그리고 어떤 단어와 변명을 붙여도,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부끄러운 순간이었고 이어서 대한민국은 길고 긴 혹한의 겨울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6. #5.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부분 역시 한홍구 교수의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에 그려진 내용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어느 분께선 이 부분에서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하셨는데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 유시민의원과 한홍구교수의 진술이 엇갈립니다. 이 작업은 기본적으로 저의 관점과 시각으로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편집하고 인용한다고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한홍구교수의 진술이 더 사실적이고 또한 극적이라고 생각되어서 한홍구교수의 진술을 취사선택했습니다. 어느 분께선 한홍구교수나 유시민의원에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라고 말씀하시던데 저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_-; 유시민의원과 이런 기회로 통화도 해보고;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 정도의 고증과 사실확인은 저나 이 작품에 있어서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연재가 끝나고 책으로 출판하기로 결정되게 되면 그때쯤엔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래는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5월14, 15일 가두시위에 이어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있었고, 운명의 5월17일이 왔다. 그날도 나는 무슨 일인지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대낮에는 이화여대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회의가 경찰의 습격을 당해 참석자 대부분이 연행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학교로는 시시각각 군부대의 이동에 관한 제보가 빗발쳤다. 각 언론사 출입기자들도 오늘 밤 상황 발생이 100% 확실하다고 했다.”

“밤 10시가 다 되어 학교를 나오다가 유시민군을 만났다. 빨리 나가자는 말에 뜻밖에 그는 자기는 학교에 남겠다고 했다. 어떻게 군인들에게 텅 빈 학교를 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일단 피해야지 무슨 얘기냐는 내 말에 유시민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됐던 그날, 학생회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나는 그저 민망한 일로 여겼던 반면, 대의원회 의장인 그는 군인들이 의기양양하게 텅 빈 학교에 주둔하는 광경을 그렸던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황현과 같은 선비가 목숨을 끊은들 그게 대세에 무슨 영향이 있겠냐마는, 황현처럼 목숨을 끊는 선비 하나 없었다면 조선의 망국이 얼마나 더 참담했을까? 유시민군을 남겨두고 통금이 다 되어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긴급 뉴스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현실에서건 역사에서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을 보게 될 때면, 광주 학살의 전야에 그 넓은 관악캠퍼스의 불 꺼진 학생회관에 홀로 남은 유시민을 떠올렸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의 그는 다가오는 카타필라의 굉음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 외 궁금하신 사항이나 의견을 댓글로 달아주시면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2004년 탄핵과 1980년 5월 서울역투쟁에 관한 한겨레 독자의 글☜

2.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 한겨레21 칼럼, 매거진☜

*<슬픔과 노여움>제 2화는 6월 4일 업데이트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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